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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2/02/13 16:49:50 |
Name |
PoeticWolf |
Subject |
화장실 솔에 박힌 머리카락도 자라나? |
퇴근을 해보니 출산 후 처음 일을 시작한 아내가 피곤한지 곤히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민한 사람인데, 뻑뻑한 방문의 마찰음에도, 겨울옷 속을 고급 순대처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유부남 살이 입을 통해 끄응끄응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정전기 소리에도 꼼짝을 하지 않습니다. 모처럼 잠이 깊이 들었구나 싶어 아래 위 입술을 꼭 붙이고, 대신 발뒤꿈치를 방바닥에서 떼어 냅니다. 방 밖으로 나가기 전에 혹시나 해서 들여다보니 아내의 옆 얼굴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냅니다. 결혼하기 전에 돈 걱정 시키지 않을 테니 넌 너의 꿈을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하려무나,라고 여느 오빠처럼 말을 했는데, 아내는 그 약속을 찾아 차라리 잠 길을 떠난 모양입니다.
방을 나와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변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변기 안쪽 면에 물 때인지 뭔지 갈색 띠가 자리를 잡으려는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물을 내려 보았으나 허사. 자세히 들여다보니 토성의 그것처럼 작은 입자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것이었습니다. 우주 저 멀리 있으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집안 화장실에선 박멸의 대상이 됩니다. 변기 옆에 세워둔 솔로 문질렀지만 대만 휘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까지 하고 말았겠지만 오늘은 아내의 새근새근 피곤한 숨소리를 듣고 나온 후였습니다. 그래서 세제를 조금 가져다 뿌려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는 몇몇 지인들처럼 아내를 대학원에 보내줄 능력의 남편상은 토성처럼 멀리 있기 때문에, 바로 눈앞의 변기를 닦아 현재의 남편노릇에 충실하려 합니다. 별만 따다주려는 남편, 아내에게 박멸 당하기 십상입니다.
불리는 동안 발을 씻으러 욕조에 들어갑니다. 누가 처녀를 납치해 숨겨둔 것처럼 머리카락 뭉치가 수챗구멍에 한 가득입니다. 납치된 처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주제로 공포 픽션이나 하나 끄적여볼까 생각하다가 그게 실제 저희 아내의 머리카락이며, 처녀를 납치해 와서 그 아가씨의 예전 모습을 없앴다는 범죄가 사실 제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게다가 이건 아까 아침에 아내가 저에게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치워달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머리카락입니다. 허둥지둥, 제가 깜빡 잊었나 봅니다. 이 현장을 아내가 보면 큰일입니다. 제 눈에 먼저 띈 사실에 감사하면서 얼른 증거 인멸에 들어갑니다. 엉켜있는 머리카락 뭉치를 주욱 잡아 당겼습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다 뽑아듦과 동시에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곧바로 저를 찾는 아내의 잠 덜 깬 목소리가 화장실 문을 두드립니다. 머리카락은 진작 치웠으며 당신이 잠든 사이에 변기를 깨끗하게 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에 머리카락을 냅다 변기 안쪽에 던져 넣었습니다. 동시에 아내가 오빠 안에 있느냐며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합니다. 물을 내리면서 재빨리 솔질을 시작했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 모아 솔을 쥔 채, 알 수 없는 종교의 참회 중인 사제처럼 성스런 얼굴로 아내를 마주봤습니다.
“오빠 언제 왔어?”
“어. 일어났구나. 더 자지. 나 지금 변기 닦고 있어.”
“아이구, 어인 일이셔.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를.”
아내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분명 변기를 닦는다고 했을 뿐인데 그걸 바로 '화장실 청소'라며 용어와 상황을 재정립해 저에게 더 많은 요구를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어라, 화장실 청소가 아닌데,라고 깨달은 건 나 원래 깨끗한 거 좋아하는 남자라며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한 후, 아내가 베란다에서 가져다 준 고무장갑과 수세미와 가루락스를 받아 든 다음이었습니다. 대규모 공동 의회 때 리더 격인 사람이 안건을 하나 내면 동의합니다, 제창합니다,가 거의 조건반사처럼 나오는 한국의 정 많은 민주주의에서 저희 가정도 자유로울 수 없나봅니다.
그런데 너무 허겁지겁 솔을 담갔습니다. 수챗구멍에서 건진 머리카락들이 물 따라 내려가지 않고, 솔에 엉겨 붙은 것입니다. 게다가 물이 휘몰려 내려가는 힘을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솔 머리가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뿌리 깊이 박혔습니다. 얼른 머리채를 잡아 쥐고 흔들었지만 샴푸와 비누에 삭아 약해진 머리카락이 뜯어질 뿐 솔 뿌리 쪽에 있는 머리카락 부분들은 원래 솔이었던 것처럼 제 손을 거부했습니다. 아내가 지저분한 마무리를 싫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한참을 솔과 씨름을 했습니다. 하지만 힘을 줄수록 머리카락이 자꾸만 끊어지는 통에 박힌 머리카락은 점점 짧아졌고, 이는 마치 머리카락이 솔 속으로 더 깊이 박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느 덧 저는 머리카락을 뽑아낸다기보다 아예 아내 눈에 띄지 않게 속으로 더 집어넣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리 없는 용쓰기가 밖에 있는 아내의 궁금증을 자극했나 봅니다. 도대체 뭐하는데 한참을 조용하냐고 문 밖에서 묻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때를 불리고 있다고 둘러댑니다. 아내는 주말에 다시 해도 되니 살살하고 쉬라고 합니다. 신혼 초에는 워낙 덜렁덜렁 거리던 총각 때 버릇이 남아 있어서, 아내의 이런 말이 굉장히 반가웠습니다만 반복된 경험 때문인지 머릿속에서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라는 오래된 노래 곡조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하겠다고 말해줍니다. 일단 급한 대로 솔과 머리카락 분리 작업은 나중에 다시 마무리하기로 하고 아까 불려둔 변기 때를 문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불려둔 덕분인지 때가 아까보다는 쉽게 변기 물속으로 첨벙첨벙 자맥질을 합니다. 하지만 광고처럼 거짓말처럼 하얗게 벗겨지는 수준은 아니라 힘을 주어 문지르기 시작합니다. 변기가 서서히 제 색을 찾습니다. 물을 내려 아내가 좋아하는 ‘깔끔한 마무리’를 하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만족감에 일어섰는데, 일어서서 변기 전체를 보니 안쪽만 깨끗하지 바깥쪽은 또 바깥쪽대로 때가 끼어있습니다. 이왕 손 더럽힌 거 할 때 한 번에 다하자는 저 답지 않은 마음으로, 그리고 일요일을 구하자는 마음으로 다시 변기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세제를 솔에 묻혀 변기 바깥 면을 아래서부터 위로, 다시 위에서부터 아래로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변기를 닦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변기 아래쪽 나사들 박힌 부분은 수세미나 솔로 닦기가 영 불편할 만큼 면이 작고 울퉁불퉁 합니다. 솔로 아무리 문질러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만큼 틈이 작은 부분에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물때가 겹겹이 들어서 있습니다. 아무튼, 아무리 문질러도 안 된다 싶은 부분까지 다 문지른 후 마무리로 물을 뿌리러 일어서다 무심코 솔을 봤습니다. 그런데 아까 뿌리 깊숙이 박힌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 있는 머리처럼 자라난 것입니다! 어느 새 그것들이 바깥으로 뽑혀져 나와 있었던 것이죠.
순간 어렸을 때 첫 단체 야영에서 젓가락을 하나하나 수세미에 문지르고 있는 저를 보고, 뭉텅이 뭉텅이로 젓가락끼리 막 비비면 된다는 한 유부남 남자 선생님의 (지금 생각해보니 가슴 아프도록) 생활력 넘치는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비누로 손을 닦으면 우리 손만 깨끗해지는 게 아니라 비누도 깨끗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희열에 가득한 시를 쓴 한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좋은 길로 지도하려는 것처럼, 아이 또한 부모의 방황을 멈추게 해주는 오묘한 관계가 생각 나 ‘오’하는 작은 탄성을 뱉습니다. 여러모로 깔끔한 마무리를 좋아하는 아내와, 어차피 오늘 당장 죽을 게 아니라면 지금의 힘을 비축해 내일 마무리해도 된다는 신조로 살아왔던 제가 서로를 피곤해 했던 처음의 모습들이 떠오르고, 누가 솔이고 누가 변기인지 대입해봅니다. 솔이나 변기나 30년 넘게 따로 살아온 시점에서부터 깨끗한 쪽은 없으며, 지금은 누가 어떤 역할을 하건 우리가 서로 맞닿아 깨끗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10하고도 수년 전, 어쩌면 더 오래 전 비누를 자기 손으로 깨끗케 하는 것이 기쁘다고 목소리 높이던 시인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신이 나 화장실 바닥에 물을 뿌리고 솔질을 시작합니다. 바닥 타일 역시 꽤나 작고 촘촘해, 솔의 머리카락이 쑥쑥 빠지기 시작합니다. 신이 난 것은 깨끗해져가는 솔 때문이 아니라 마찰을 일으키며 자라고 있는 아내와 저의 관계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이 없어지고 있는 솔처럼 세월이 제 머리를 듬성하게 다듬을 때쯤 아내와 저는 깨끗한 변기와 솔이며, 비누와 손이 되어 있을 것을 미리 보는 느낌입니다. 성장을 키워드로 삼고 있는 저희 부부 사이에 소소한 힌트가 불쑥 이렇게 찾아옵니다.
어느 새 부엌 청소와 설거지를 ‘깔끔하게’ 마친 아내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며 화장실로 와 문을 엽니다. 깨끗해진 변기를 발견하고, 수고했다고 웃어 줍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내 눈에 반쯤 비누거품이 나고 있는 바닥과, 땀 흘리며 실실 웃고 있는 저와, 그 인간이 들고 있는 변기용 솔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내가 웃음을 지웁니다.
“지금 바닥을 변기용 솔로 닦고 있는 거야? 나 맨발로 다니는 곳을?”
하긴, 아직 저나 아내나 아직 머리에 숱이 많습니다. 그 사실이 또 반가워 그냥 웃어줍니다. 문득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가 다시 환청처럼 들립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1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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