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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2/01/28 19:40:40 |
Name |
happyend |
Subject |
아버지와 아들 (上) |
1.
자식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란다고 하였던가요? 아들은 늘 등만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멀리 아버지의 등이 뽀얀 먼지 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거리에 남겨진 한없는 쓸쓸함을 채우기 위해 아들은 곧 집으로 들어와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에게 아버지는 등, 먼지,쓸쓸함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렇게 멀리만 계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다시 승복을 입고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은 분황사 마당을 나는 듯이 뛰어넘어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자신을 위해 승복을 벗었던 아버지가 다시 승복을 입고 찾아왔을 때 아들은 이별을 예감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며칠을 지냈고 아버지는 곧 좁은 동굴을 파고 스스로를 가둔 채 마지막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렇게 누구보다 위대했던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것은 다비식이 끝나고 덩그마니 놓여 진 하얀 유골. 그 뼛가루를 절구에 찧으며 아들은 다시 상념에 잠겼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보다 푹신한 비단방석위에 앉아 보석처럼 아름답고 아득한 언어를 아끼듯 풀어내며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을 수 있었던 특급 엘리트의 길을 포기한 것은 어느 날 동굴에 남겨진 유골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왜 그 발걸음을 되돌린 것일까?’
아들은 그 물음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절구의 유골을 빻고 또 빻았습니다. 마치 승천을 바라는 영혼의 몸짓처럼 뼛가루는 작은 공기의 흐름에도 나풀거렸습니다.
모란이 붉게 핀 어느 날, 설총은 그렇게 아버지 원효와 이승에서 영원한 이별을 했습니다.
설총의 탄생은 잘짜여진 각본보다 더 드라마틱했습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권력자 김춘추를 외할아버지로 하고 그의 딸 요석공주를 어머니로 한 데다 원효를 아버지로 하였으니 말이죠. 신분은 아버지를 따라야 하는 6두품이었으나 설총은 외할아버지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원효를 사위로 삼아 위대한 인물을 얻겠다는 김춘추의 바람대로 설총은 나면서부터 남달라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책을 좋아하였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미 수준 높은 한문 실력을 갖춰 이름을 얻었습니다. 6두품 문장가들이 그렇듯이 외교관으로 명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왜 김춘추는 원효가 필요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사랑스런 딸과 결혼시켜 얻고자 한 위대한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2.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중국문명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후발주자로서 신라는 그 어떤 나라보다 더 서둘러 선진문물=중국문명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오래 유지되던 전통사회의 틀은 그만큼 강고했습니다.
법흥왕이 율령국가로 신라를 올려놓았다고는 하지만, 법을 정하고 해석하고 적용할 관리양성소인 학교가 삼국중 유일하게 신라에만 없었습니다. 전통사회에서 교육은 지방향촌사회의 몫이었고, 이들은 국립학교에 학생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학생없는 학교를 열 수는 없는 법, 법흥왕은 율령국가의 마지막 퍼즐이라고 하는 학교를 결국 만들지 못했습니다.
모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완성은 국립학교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변하지 않았지요. 국립학교에서 국가의 규격과 애국심을 배우고 왕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릴 인재가 탄생합니다. 국립학교를 만들 수 없었던 신라는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이 화랑도를 통해 충성심을 수렴해내는 신라적인 방식의 교육제도를 정착시킴으로써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관리란게 마을을 다스리고 전쟁을 지휘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교문서를 작성해야 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하고 그것을 다시 신라의 지식인사회에 전수해야 합니다. 결국 학교를 만들 수 없었던 신라는 불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뒤 왕실에선 이른바 국비유학승들을 대거 양성합니다. 이후 당나라 유학은 엘리트가 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귀국한 유학승들은 왕실과 귀족사회의 존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길고긴 통일전쟁의 기간 동안 지식인으로서 사상적 통합을 이루고 외교관으로서 문서작성와 외교교섭을 맡았으며 과학자로서 중국 과학기술,의학등의 도입과 보급에 기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속에서 나고 자란 의상과 원효는 중국유학을 준비합니다. 그것은 촉망받는 승려의 당연한 수순이었지요. 다만 그때가 삼국통일전쟁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에 더 위험부담이 컸다는 점이 조금 달랐을 뿐이었습니다.
그 뒷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원효는 중국 유학을 포기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가던 어느 날 밤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깨어보니 해골 안에 든 물이었다는 것을 본 뒤 깨달은 게 있어서라고 합니다. 해골바가지는 도대체 그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일까요?
3.
법흥왕이 불교를 국교로 인정한 까닭에 대해 <삼국유사>에선 참으로 매력적이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로 설명합니다.
‘백성들이 복을 빌고 죄를 사함 받도록 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지만 신라의 평민들에게 불교는 참으로 먼 곳에 있었습니다. 삼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왔기 때문에 어려운 중국어로 된 것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경전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였고, 그들은 대부분 중국 유학파들이었습니다. 불교는 소수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경주 귀족과 그밖의 서민들 사이엔 심각한 정신적 괴리감이 생겨났습니다. 삼국시대 불상 혹은 사찰(사찰터)의 분포지를 보면 수도의 귀족들만이 불교의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방의 백성들은 철저한 종교소외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귀족불교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승려들이 물론 있었습니다. 원광, 그리고 밀본이 그 주인공입니다.
(여기의 밀본은 말이죠, ‘뿌리깊은 나무’의 그 밀본이 아닙니다. 제가 밀본에 대한 연구를 마친 뒤, 밀본이란 말을 듣고 드라마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물론 쿡티비를 통해 뒤늦게 보긴 했습니다만- 깜짝 놀랐었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조금의 연관성도 없습니다. 신라의 밀본은 승려입니다.물론....밀본이란 이름이 밀교의 수장,즉 본원을 일컫는 말이라 여겨지므로 공통점을 억지로 찾을 수는 있을 듯 합니다만. 하여간 실존인물 밀본얘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어릴적부터 지적호기심이 많았던 원광은 신라에선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노자,장자,공자의 사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할 수 있는 책을 구해서 혼자 공부를 하던 어느날, 자신이 머무르던 삼기산에 한 승려가 찾아옵니다. 그 승려는 경주 출신의 엘리트. 지적 호기심에 찾아간 원광은 냉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승려는 자신의 수행외엔 관심이 없어보였습니다.
실망한 것은 원광만은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슬리는 행동을 일삼는 승려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 지은 암자는 길을 막고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큰소리로 외우는 주문은 소음공해였습니다. 불교는 귀족들에겐 환영받을지 몰라도 산골마을 백성들에겐 여전히 낯설었으니 승려와 마을 간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원전인 <삼국유사>를 따르면 마을 사람들은 산신령을 믿는 전통신앙에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승려의 행위는 산신령을 노하게 하는 자연파괴행동이었습니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고 여긴 원광은 그 승려를 찾아가서 상황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승려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지요. 결국 그날 밤 결국 사고가 났습니다. 암자는 무너지고 없었습니다. 산사태처럼 보였지만 마을사람들이 한 일임이 분명했습니다. 원광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수행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자기 이익만 좇고,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중국은 여러 학문이 있으니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광은 즉시 중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중국은 (통일)전쟁 중이었습니다.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여러 해 동안 백성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고통을 바라보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학문은 자신의 구원보다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지요. 원광은 결국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 후 원광은 수나라에서도 인정받는 명승이 됩니다. 그리고 600년(신라 진평왕때), 원광은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도 신라의 지방은 여전히 전통신앙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승려들은 경주출신이거나 유학파들이 많아서 굉장히 자부심이 강해 둘은 융합하지 못했습니다. 소통의 부재. 물과 기름처럼 신라는 겉돌았습니다. 중앙집권권력도 국립학교도 없던 신라로선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불교세력과 전통세력간의 갈등은 진지왕과 진평왕의 왕위계승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합니다.)
원광은 다른 유학파 승려들과 확실하게 달랐습니다. 그가 수나라에서 깨달은 것은 존중이었습니다. 원광은 모든 학문을, 당시로서는 유교,불교,도교를 아울렀으며 심지어 전통신앙도 받아들였습니다. 귀족종교에 머물다가 끝나버린 백제, 아집을 버리지 못한 채 도교세력과의 세싸움에서 밀려 쇠퇴해가던 고구려의 불교에선 없는 것을 신라에 가져다 준 것이지요. 원광이 창조해낸 새로운 신라불교는 삼국 중에 유일하게 전통신앙과 불교와의 융합을 모색한 것입니다. 소통. 그것을 해낸 것입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전쟁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을 묻는 다면, 이렇게 만들어낸 정신적 통일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원광이 만들어낸 이 융합불교는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 민족의 정신적 가치로 존재합니다.주변 사찰에 가보시면 아주 쉽게 ‘산신각’이라는 곳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산신령을 모시는 곳이죠. 불교입장에서 이것은 이단이거나 우상숭배일까요?
원광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 한국의 사찰에는 반드시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산신각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적 전통과 외래 종교 불교와의 화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에 사는 신이 마을을 지켜주리라는 산신신앙은 자연의 혜택을 받아온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이며 자연에 대한 겸허함을 표현하는 오래된 사상입니다. 물론 인류보편적 관점에서 그것은 단지, 청동기시대의 토템신앙의 한 표현일 뿐이긴 합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자연에 대한 경외와 숭배가 한국인의 dna에 각인된 자연에 대한 경외와 사랑의 원천이란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원광의 이런 새로운 형태의 불교사상은 전통사회의 청년조직에 정신적 타협점을 제시합니다. 전통은 마침내 그 힘을 얻었고 신라의 불교는 강력한 사상적 정신적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말그대로 시너지 혹은 윈윈이었던 것이지요. 전통에 대한 존중이 빚어낸 가장 강력한 힘이 세속오계와 화랑도를 통해 표현되었고, 삼국통일과정에서 왜 그토록 신라가 헌신적이고 정신적으로 강력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한가지 요소가 됩니다.
(원광이 한국 전통신앙과 불교를 결합시켜내는 이야기는 ‘삼기산 검은 여우 설화’의 이야기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4.
하지만, 전통사회의 틀을 비집고 들어간 원광의 성공적인 포교모델은 곧 벽에 부딪칩니다. 어찌되었든 원광의 세속오계를 받아들인 이들은 전통사회의 지도자급들.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는 남의 나라 언어였습니다. 원광도 어찌되었든 유학파였습니다.
지방행정조직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신라로서는 삼국통일전쟁의 스케일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몇몇 화랑이나 귀족들의 희생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평민층의 지지없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김춘추는 첫 진골출신 왕. 경주에 쌔고 쌘게 진골귀족이었으니 왕권은 태생적으로 취약했습니다. 이 힘의 균형을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이자 왕실만이 가진 어드밴티지가 바로 평민층의 지지였습니다. 김춘추의 귀에 괴짜 승려 원효의 이야기가 들려온 것은 이때였습니다.
원효는 스펙 자체로 보면 정말 별볼일이 없었습니다. 신분은 경주출신 귀족도 아닌 시골출신 6두품. 거기에다 치명적으로 비유학파였습니다. 한마디로 경주에선 씨알도 안먹히는 스펙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라한 학벌과 신분을 갖춘 비엄친아였지만 그는 대중적으로 폭발적인 이슈메이커였습니다. 기이하고 구애받지 않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이지요.
김춘추는 사실, 기존 정치판에 질리고 있었습니다. 각 부족대표회의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신라시대의 원로원인 화백회의는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귀족들은 찍소리도 하지 않고 권력의 눈치만 보았습니다. 창조성이 사라져버린 의회.식물국회. 그러나 회의장 밖의 귀족들은 조금도 평민을 바라보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탐했습니다. 경주남산에 즐비한 귀족 사찰들. 그곳의 승려들은 당나라 유학파들이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전을 과연 알아듣고 있는지도 모르는 귀족들을 위해 읊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람처럼 원효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평민의 언어로 부처의 언어를 표현했습니다. 그 상스럽고 불경한 표현에 귀족들은 치를 떨었지만 자신의 절을 만들어 유학파 승려를 모셔올 수 없었던 가난한 백성들은 비로소 부처를 만나 복을 빌고 양심의 가책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스타 원효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더 대담해졌습니다. 공공연하게 혁명을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지요.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주려나
내가 하늘 괴는 기둥을 자를 터인데“
경주시내에 울려퍼지는 뜻모를 노래의 작사작곡편곡자는 원효였습니다. 참으로 간이 배밖으로 나온 노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재밌다는 이유로 마구 불러젖혔습니다. 이것이 ‘가카 헌정 음악’이란 것을 영민한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알았습니다. 그 불경함이라니.....그 불온함이라니....그 경박함이라니....하지만!
김춘추는 평생을 곱게 자라온 귀족이나 왕족과는 달랐습니다. 고구려에선 감옥에 갇혀 죽을 뻔했고, 자신을 죽이려는 백제 자객의 칼을 피하기 위해 007급의 작전을 수행하며 당나라행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변덕스러운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오가던 뱃전에선 치욕과 슬픔으로 혀를 깨물고도 싶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통일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다면 동네 건달의 바짓가랑이를 기었던 한신보다 더 한 것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다른 삼국의 가카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반대의견 중에서 꼭 필요한 것만은 받아들일 귀를 가진 점이었지요. 연개소문도 의자왕도 갖고 있지 않은 이것을 그는 갖고 있었고, 어쩌면 그만큼 그가 가장 벼랑 끝에 몰려있었던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김춘추는 원효의 혁명성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김춘추와 원효는 장인과 사위가 되었지요. 훗날, 자신의 딸을 6두품과 결혼시키기보다는, 춥고 배고픈 신라인들에게 꿈과 희망과 의식주와 직업을 제공했던 장보고를 죽여버린 왕과 그 진골귀족들의 행동이 천년왕국을 어디로 이끌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김춘추는 진정한 정치인이었고 시대를 읽을 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간. 6두품을 품에 안아 자신의 외손자가 평생을 6두품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을 감내한 김춘추의 선택.이 선택이 위대한 사상가 원효와 설총을 낳게 됩니다.
5.
원효가 다시 승복을 입고 토굴에 자신을 가두고 마지막 수행을 시작하자 아들인 설총은 근처에 집을 짓고 아버지를 지켰습니다. 토굴을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를 위한 수발을 자처한 설총. 평생 떠돌아 다니기만 했던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침 이슬을 맞으며 새벽에 샘물을 길어다 아버지 옆에 놓는 설총. 아침 샘물은 H₂O의 결정이 가장 6각형에 가깝다고 하여 몸에 흡수된 뒤 면역력을 높이고 생명력을 기른다고 하였던가요. 설총은 아버지를 위해 새벽잠을 쫓으며 시린 손을 마다하지 않고 샘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어느 날,물을 마시고 난 아버지를 향해 설총이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그때 당나라로 가던 길을 포기하셨습니까?”
토굴 속에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원효의 얼굴이 잠시 일렁이나 싶더니 이내 표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깊고 깊은 참선에 빠졌습니다. 아버지의 등. 작고 초라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는 설총의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김춘추와 원효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요석공주를 통해서 끝났습니다. 아들 설총이 태어나자 원효는 승복을 벗었고, 스스로 세속의 사람이 되어 궁궐을 떠났습니다. 이미 6두품인 자신을 받아들인 김춘추의 포용력과 세상을 향한 소통의 의지앞에 더 이상 혁명을 요구할 길이 없어진 것이지요. 대신에 원효는 저잣거리로 들어갔습니다. 위로의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아래로의 혁명.권력자의 의지를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려운 대중의 의식을 바꾸는 길에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김춘추가 스스로 의지를 바꾸었음을 원효는 인정한 것입니다.
그가 환속하여 작사작곡편곡한 노래의 제목은 <무애>.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사람은 한가지 길로 나고 죽는다’는 화염경의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보다 더 혁명적인 것이 있을까요? 철저한 신분사회인 고대사회에서 삶도 죽음도 동등해지다니요.
원효는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랫말로 만들었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불교를 이해시켰습니다.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며 독 짓는 옹기장이에다 원숭이 무리들까지’ 불교를 알게 되어 복을 빌고 죄를 사했습니다.
근대이후 서양의 선교사들이 일본,중국,한국,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의 나라에서 열정적인 선교를 했습니다. 그 결과 베트남의 문자는 바뀌었고,한국에선 한글이 대중화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중국에선 문어체중심인 고문이 백화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혁명적이었으나 문자를 향유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자의 차이는 여전히 좁혀지지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문자와 언어생활을 바꿀 수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결국 종교가 성공적으로 상륙하는가를 좌우하기도 했습니다. 문화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파급력이 큰 것, 그것이 언어였습니다.
원효를 성공으로 이끈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복잡한 한문, 어려운 경전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복을 빌고 죄를 사하는 주문은 ‘나무아미타불’하나! 뽕나무 밭 노인이나 독짓는 옹기장이나 원숭이나 법화경과 화엄경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이 종교일까요? 원효는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지요. 참으로 ‘무애’한 경지였죠.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난해하다는 화엄경은 그렇게 쉽고 간단한 단어하나로 집약되어 신라인 모두에게 평등한 서방정토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통일 후, 단 한번도 같은 민족으로 묶인 적이 없던 세 나라 사람들을 한데 묶을 수 있었던데는 불교라는 단일종교의 힘이 가장 컸습니다. 그들은 다같이 부처의 나라, 즉 불국토의 백성이라는 동질감이 작용한 것이지요. 통일신라인들은 화엄이란 단어를 평화와 통합과 평등의 언어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효의 업적입니다.
6.
통일 이후, 진골귀족이라은 왕권의 태생적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신문왕은 문민통치의 극한을 추구합니다. 그가 달리 ‘문민통치의 신’이란 이름을 얻었을까요. 조직과 관리를 이용한 중국의 유교적 통치이념. 이 통치의 장점은 왕이 신의 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반대로 단점은 누가 그 자리에 있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유교적 통치관념하에서는 내전이든 국제전이든 간단해집니다. 왕만 바꾸면(혹은 죽이면) 됩니다!
따라서 신문왕의 통치아래, 아니 신라 중대의 통치이념하에서 출세하는 길은 간단했습니다. ‘한문’을 잘 쓰는 것이죠. 모든 공식문서는 한문으로 되었고, 한문을 잘 구사하면 세속에선 출세의 길을 출가하면 호화판 대형사찰의 주지의 길을 보장했습니다.
이때 최고의 한문실력자는 누구였을까요? 타고난 영민함과 아버지에 대한 묘한 콤플렉스, 그리고 할아버지의 후광,....성공의 3요소를 가지고 태어난 설총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지요. 설총은 왕의 멘토가 됩니다.
진골귀족을 견제하는 방법은 두 개였습니다. 전쟁에 일으켜 힘을 빼버리거나(아주 많은 나라에서 벌어졌죠), 아니면 중산층을 이용하는 것 즉 6두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었지요. 6두품이면서 최고의 실력자이고 왕의 고종사촌인 설총. 이보다 더 권력에 가까이 갈 기회가 있을까요? 부귀영화가 그의 눈앞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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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오로지 가독성때문에 두편으로 나눕니다.
이 이야기는 정치도 종교도 아닌 오로지 역사이야기입니다.역사는 역사일 뿐....
좋은 주말 보내세요*^^*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08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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