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 근처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커피집이 덜컥하고 생겨났다.
도서관 앞 커피창고, 육교 건너 슬립리스까진 제때제때 눈치를 챘는데 그 다음부터는 순서를 알수가 없이 중구난방 생겨나버렸다.
이마에 하나, 볼에 하나 났던게 시작인건 알겠는데 그 다음부턴 순서를 알 수 없는 여드름을 보는 기분이라면 정확한 표현일까.
당최 뭐가 뭔지 알수가 없구만. 그 어떤 커피집에 들어가 방대한 메뉴판을 볼 때마다 헤메였던 눈길만큼이나, 나의 발걸음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왠지 기분이 나서 비싼 테캇커피 한 잔 손에 들고 출근하려던 계획에 조금씩 차질이 생기는 것 같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버스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커피집에서, 가장 눈에 익은 카라멜마끼야또를 테캇한다.
근데 생각해보니 평소와 다른 사치를 부릴 돈은 충분했건만 그 사치를 위한 시간을 미처 생각지 않았다. 멍청하긴.
#2
사실 나에게 커피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에스프레소에 적당량의 이걸 넣으면 저게 짠, 저걸 넣으면 이게 짠, 이라는데
사실 그건 이 수식에 미분을 하면 요게 짠, 적분을 하면 조게 짠, 하고 나타난다는 설명이나 진배없다.
흥미가 전혀 생기지도 않고, 나에게 별다른 의미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커피라면 자고로 적당히 달달한 맛에 카페인이 들어있는듯해서 잠이 안올법한 플라시보 효과만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다.
음, 이야기가 나왔기에 하는 말인데 커피에 대한 생각은 사랑에 대한 생각과도 엇비슷하다.
내가 요렇게하면 이런 사랑이 짠, 조렇게하면 저런 사랑이 짠, 그런건 별 관심이 없다.
적당히 달달한 맛에 애정이 들어있는듯해서 행복한듯한 플라시보 효과만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이것 참 그럴싸하네. 한참을 생각하다 커피를 받아들고 부리나케 버스를 타러 간다.
#3
커피는 식는다. 혀가 데일만큼 뜨거운 커피를 달라고 했어도,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점원의 목소리와, 이쁘장한 포장의 컵.
그리고 마침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를 받아들면, 그 뜨거움은 이제 온전히 나의 책임이 된다.
테캇한 커피가 왜 차가워졌느냐고 클레임할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래. 던져버린 야구공처럼, 놓아버린 IV주사처럼, 식어버린 테캇커피는 어쩔 수 없다.
이 커피가 뜨거웠을땐 이보다 조금 더 달콤했겠지. 조금 더 나를 달래주었겠지. 하고 생각해볼 뿐.
애석하지만 식어버린대로 만족을 하거나, 그게 싫다면 식기전에 후루룩하고, 아 뜨거워, 그래도 좋네. 하고서 마셔버리면 그만인 것을.
잠시잠깐 눈 돌릴틈도 없이 바쁜 일들이 나를 닥쳐올때가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걱정을 하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게끔 만들어버리는 갖가지의 일상들.
그렇게 조금의 정신머리도 유예할수 없게 되는 순간 그렇게 커피는 식는다. 아마 사랑도, 그렇게 식는다.
받은 이후의 책임은 나의 것이였음을, 오늘 다시 한번 통탄하며 식어버린 커피를 마신다. 혹시나 내가 받은 사랑이, 식어버리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아, 젠장. 커피는 식어도 맛있구나. 사랑은, 혹시나 식어버렸다면, 그것 또한 달달하게 감내할 수 있을까?
글쎄,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문제다. 아무쪼록 사랑이 식지 않았기를, 혹시나 식었다면, 음.
"정시출근 했습니다!"
"1분 늦었어. 뭐하느라 이제 온거야? 내가 30분씩 일찍 다니라 했어 안했어, 그리고 너 지난번에…"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19 1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