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속에 홍종우는 국제정세을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프랑스에 갈 배삯을 모으기 위해 홍종우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사히신문사에 취업을 합니다.
아사히신문사에서 국제신문등 접하면서 해외에 대한 지식을 쌓고 프랑스어와 일본어을 배웁니다.
2년이 지난후 프랑스로 유학을 간 홍종우는 프랑스사교클럽에서 한국문화를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많는 노력을 했습니다.
홍종우는 한국의 문화를 유럽에 전파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을 번역합니다.
특히 춘향전의 번역판인 "향기로운 봄"은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유럽의 사회는 어느정도 반향을 가져왔습니다.
최초의 한국번역소설 향기로운 봄(춘향전)
홍종우을 도와 번역을 완성한 프랑스작가 로니가 춘향전에 대해서 감탄을 했죠.
"이 이야기 속에서 변사또를 비롯한 악인들이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이 국제사회에 잔잔한 영향을 주었고 결국 세계적인 안무가인 미하일포킨이 "사랑의 시련"이라는 발레로 만들어서 공연을 하는 쾌거을 이룹니다.
20세기 현대발레를 대표하는 안무가 미하일 포킨(1880~1942)이 홍종우가 번역한 춘향전(향기로운 봄)을 토대로 만든 발레
[사랑의 시련]
또한 박물관에서 처음 설립된 한국 문화 전시실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홍종우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최초의 번역가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2. 김옥균과 홍종우의 엇갈린 운명
김옥균이 외세의존적 근대화를 추구했다면,홍종우는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했습니다..
홍종우는 김옥균에 비해서 덜 알려졌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김옥균과는 달리 홍종우는 벽촌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1890년 프랑스로 건너가 체류하면서 근대화의 열망을 키워지만 그가 생각하는 근대화는 김옥균과는 방법이 전혀 틀렸습니다.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가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에 단발을 하고 이와다 슈사쿠로 개명한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 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습니다.
일례로 홍종우가 약간 보수적이라서 프랑스안에서 한복을 고집했지만 프랑스사교클럽에 참석해서 세계열강들이 무슨일을 하는지 세계정세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습니다.
홍종우는 열강 제국주의 세력들의 본질에 대해 깨닫고 외세의 힘을 얻어서 개화를 하는 것을 반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왕권을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했죠.
홍종우는 귀국한후 일본이라는 외세를 힘으로 개화를 주장했던 김옥균을 쏴죽이고 친일파를 없애는데 앞장섰죠.
당시 일본신문에 실린 김옥균 암살뉴스 (양복이 김옥균, 한복이 홍종우)
3. 홍종우 이승만의 재판관을 맡다.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고위직의 괸리가 됩니다.
한편 이승만은 왕국해체를 주장하며 거리유세을 합니다.
위기감을 든 정부는 이승만에 대한 제재을 착수했고 홍종우가 보부상을 시켜서 방해한후 역모죄로 이승만을 체포해버리죠.
이때 홍종우는 이승만사건의 재판관으로 나옵니다.
이승만자서전에 나온건데 정부에서 체포된 이승만을 사형시킬려고 했지만 홍종우가 힘을 써서 사형은 면했다고 합니다.
홍종우는 종신형에 태형 100대를 선고합니다..
종신형보다 무서운 것이 태형이죠.
장정도 몇 대만 맞으면 기절합니다.
100대를 맞았다면 살아도 평생 불구가 되기 십상이었지만 이승만은 매를 한대도 안맞았습니다..
홍종우는 태형100대를 선고했을뿐 이승만에게 태형을 하지 않았습니다.
1903년에 친일 관료세력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홍종우는 제주도 목사로 좌천되었고 결국 자택에서 쓸쓸이 죽었습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15 1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