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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6/17 01:28:51
Name   Tigris
Subject   유랑담 약록 #08 / 120609土 _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


A, B, C… 순으로 전진하다가 E 이후 어디쯤에서 잠들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 (略)
 두 번째 사진 속의 얼굴, 이건 또 깜짝 놀랄 만큼 변해있다. 교복 차림이다. 고교 시절 사진인지 대학 시절 사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대단한 미남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이상하게도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略)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인간 실격』 서문 중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略)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略)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가족에 대해서조차도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고, 그저 두렵고 거북해서 그 어색함을 못 이긴 나머지 일찍부터 숙달된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저는 어느 틈에 단 한마디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인간 실격』 첫번째 수기 중






 또 한 사람은 여자 고등 사범 학교의 문과생인 소위 '동지'였습니다. (略) 협의가 끝나고난 뒤에도 그 여자는 언제까지나 저를 쫓아다녔고 마구잡이로 저한테 이것저것 사주곤 했습니다.
 "나를 진짜 누나라고 생각해도 돼."
 저는 그 같잖음에 닭살이 돋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수 어린 미소를 짓고 대답합니다.

『인간 실격』 두번째 수기 중






 그 즈음 저는 또 긴자에 있는 어떤 큰 카페의 아가씨한테 뜻밖의 신세를 졌습니다. (略) 혼조에 있는 목수네 집 2층에 그 사람은 세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2층에서 평상시 저의 음산한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심한 치통이라도 앓고 있는 것처럼 한쪽 손으로 볼을 누른 채로 차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모습이 오히려 그 사람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도 주위에서 차가운 삭풍이 불고 낙엽만이 휘날리는 듯한, 완전히 고립된 느낌의 여자였습니다.
 (略) 그러고나서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略) 그렇지만 그때는 아직 '죽자'는 각오가 진지하게 서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어딘가 '놀이'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略) 필경 당시의 저는 아직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겠죠. 그때 저는 자진해서라도 죽으려고 진심으로 결심했습니다.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이 허리띠는 가게 친구한테 빌린 거니까 하면서 허리띠를 풀어서는 개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고, 저도 망토를 벗어서 같은 곳에 놓아두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인간 실격』 두번째 수기 중






※ 이상의 발췌, 모두 「太宰 治, 인간실격, 김춘미 역, 민음사 2004」에서.
 










《A》



 깨어났을 때 오토캠핑장의 차들은 사라져있었다. 9시였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이륜차에 걸터앉아 어제 사둔 햄버그 스테이크를 먹었다. 빈 곽을 버리려고 주변을 걸었으나 어디에도 쓰레기통이 없었다. 수돗가 부근의 쓰레기장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위에 '쓰레기는 각자 가지고 돌아가주십시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과연 어디에도 쓰레기가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이 규정은 잘 지켜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출발준비를 마친 후 산책하듯 가볍게 캠프장 주변을 걸었다. 이곳 아시노 공원(芦野公園)은 2,300여 그루의 벚나무가 있어서 일본 벚꽃 명소 100선에도 꼽히는 곳이라고 들었으나, 계절이 계절인지라 분홍의 풍경은 일절 없었다.








 호수로 다가가니 물비린내가 짙어졌다. 다리로 이어진 길 옆에는 호수의 유래, 다리의 구조 등을 설명하는 표지판과 낚시에 대한 경고판이 있었다.







'배스블루길의 이식은 금지되어 있으며, 잡았을 때에도 방류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일본에서도 문제인 모양이다.









 다리는 부교(浮橋)였다. 콘크리트 조각으로 된 다리가 물 위에서 이어져 있었다. 다리를 건너보았으나 흔들림은 거의 없었다.








 물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주변 숲 어디에선가 노랫소리, 응원소리, 함성소리 같은 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수련회를 온 학생들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다리 너머에 있는 또다른 다리는 목재발판이 몇 개 빠진 상태로 '통행금지 - 공사중' 팻말로 막혀 있었다. 아침 산책은 거기까지였다.











 오토캠핑장을 떠나, 우선 마트에 다시 들렀다. 마트의 모습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 정리된 덕인지 어제처럼 충격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간헐적으로 안내방송이 나왔다. 대략 '오늘도 저희 마트를 이용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는 내용이었는데, 어째 알아들을 수 없는 부사와 종결어미가 섞여 있었다. 도호쿠 사투리인 모양이었다.

 자동차 용품 코너의 한쪽에 이륜차용 방수커버가 있었다. PS250은 중 사이즈를 쓰라고 되어 있었는데, 한 사이즈 크게 사면 짐을 둔 채로도 커버를 씌울 수 있을 듯했다. 밤에 잘 때도 커버를 씌운 채 짐끈으로 봉해두면 도난염려도 덜 수 있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짐에 방수커버를 씌운 채 강행군을 할 수 있을 듯 싶었다. 나는 대 사이즈 커버를 3980엔에 구입했다. 얄팍해진 지갑이 아찔했다.





캠핑용품 코너의 그릴에는 재밌는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귀여웠다.
무방비라는 것은 곧 훔쳐가는 사람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산 제품도 있다.








마트 한쪽에는 한류 상품 코너가 있었다. 이런 시골에도 한류의 수요, 공급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대부분은 한국요리와 대중가수에 관한 것이었다.








'서로 청결히 합시다.'
굽실거리는 것도 아니고 명령하는 것도 아닌 점잖은 문장이 화장실 세안대에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적절함이 마음에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 샤요칸(太宰治記念館 '斜陽館')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차장은 건너편 샤미센 회관과 공동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쓰가루 샤미센 회관.








'여기는 쓰가루 샤미센 회관 - 쓰가루 샤미센 발상의 땅
샤미센이라고 하는 화악기(和樂器, 일본악기)가 긴 역사 속에서 변모를 이루어,
과혹過酷한 운명을 짊어진 맹인들이 목숨을 걸고 고안해낸 두드리기 주법(叩き奏法),
즉 쓰가루 샤미센이 탄생했던 것이다.
'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 샤요칸은 1907년 다자이 오사무의 부친 쓰시마 겐에몬(津島 源右衛門)에 의해 세워진 목조주택이다. 1950년 다자이 오사무 사후 여관 경영자에게 인수된 이 건물은 한동안 다자이 오사무 문학기념관을 병설한 료칸(전통여관)으로 운영되었고, 1998년에는 경영이 악화된 료칸을 관청에서 매입하여 현재와 같은 기념관으로 재개장했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가 살았던 집이자 일본식과 서양식이 혼재된 메이지 시대의 건축물, 동시에 지방 대지주의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저택으로서 일본의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입구 매표소에는 국가 중요문화재 인증서가 붙어 있었다. 입장료 500엔을 내고 들어서자 봉당(土間)이 보였다.








 봉당의 벽에는 매년 열리는 기념제의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그 곁의 테이블에는 방명록이 놓여있었다. 방명록이래봐야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노트였다.

 방명록에 무어라 쓸 것인지는 기념관을 둘러보며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이미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벽돌로 된 저택 외벽의 정면은 프랑스 식, 양측면은 영국식으로 쌓았다고 한다.








 1층 가운데의 마루(板の間)에서는 2층의 외벽이 올려다보였다. 본 저택은 1층 11개방 278평, 2층 8개방 116평, 부속건물 및 정원까지 모두 포함한 택지가 680평에 달한다. 다만 각 공간이 조밀하게 분별되어 있고,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장소도 많아서 체감 면적은 그렇게까지 넓지 않았다.








 마루에는 기념사진용 망토가 걸려 있었다. 손바닥만한 안내판에 '다자이 오사무는 이중 망토를 즐겨 착용했습니다. 이 망토들은 카나기 주민들의 호의로 기증된 것입니다. 기념촬영에 이용해주십시오.'라 되어 있었다. 다른 손님이 입은 것을 보니 과연 다자이 오사무하면 떠오르는 옷차림 그대로였다.








 1층은 세 곳의 소규모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중 두 곳은 촬영금지였다. 전시실에는 다자이 오사무가 생전에 입었던 옷, 소설 「쓰가루」의 초판본, 사용했던 식기와 가구, 소설 『달려라 메로스』의 육필원고 일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의 편지 등 여러 물품이 유리전시장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소설 『인간 실격』의 육필원고인 듯한 물건도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설명을 읽어보니 『인간 실격』의 첫 영어 번역 원고였다. 전시품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중학생 시절의 노트였는데, 사소하고 장난스러운 낙서와 그림―특히 사람의 얼굴을 그린 것이 꽤 개성적으로 보였다―들을 보니 그가 틀림없이 실존했었던 사람이라는 당연한 실감이 들어서, 묘한 불쾌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속없이 반갑고 기쁜 느낌이 들어버렸다.








'히로사키 고등학교 재학 당시의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본명 쓰시마 슈지(津島 修治).

 1909년 6월 19일, 현의원, 하원의원, 귀족원의원이자 부농이었던 통칭 '카나기의 영주' 쓰시마 겐에몬의 11자녀 중 열째이자 육남으로 출생.

 1916년 카나기 제일 소학교 입학.

 1920년 장래 희망을 묻는 담임교사의 설문에 ‘문학’이라 회답. 이 무렵 민주주의(공산주의)라는 사상을 처음 알게 되어 당혹감을 느꼈다.

 1923년 아오모리 현립 아오모리 중학교(현 아오모리 현립 아오모리 고등학교) 입학.

 1925년 습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후(最後の太閤)」를 집필하고 동인지를 발행한다.

 1927년 히로사키 고등학교 입학 후 이즈미 쿄카(泉 鏡花)나 톨스토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의 작품에 심취하는 한편 다이쇼 데모크라시, 즉 좌익운동에 헌신했다. 이 해 7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자살한다.

 1929년 12월 증조부의 고리대금업으로 크게 흥한 자신의 출신계급에 관한 고민 끝에 신경안정제를 과다복용하여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1930년 프랑스 문학을 동경해 도쿄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 불문학부에 입학. 허나 높은 수준의 강의를 따라가지 못하는 한편 친가에서 송금해온 돈으로 도락의 나날을 보내며 자기혐오가 깊어진다. 이 무렵 끽차점의 여급이었던 유부녀 타나베 시메코(田部 シメ子, 1912.12.2~1930.11.29)와 함께 가마쿠라 해안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타나베만 죽고 다자이는 살아남는다. 자살 직전 타나베가 마지막으로 외친 이름들 중에 다자이 오사무는 없었다고 한다.

 한동안 공산주의 활동에 몰두하였으나 사상 자체에 진심으로 경도된 것은 아니었으며, 1933년 단편 ‘열차(列車)’를 발표하는 등 창작에도 힘쓴다.

 1935년 3월 도쿄 대학을 중퇴. 소설 「역행(逆行)」과 「어릿광대의 꽃(道化の華)」이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오르나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 康成)가 다자이의 실제 생활과 소설과의 관계를 연관지어 부정적으로 평가('작자의 실제 생활에 어두운 구름이 끼어 있다. 문학적 능력에 의한 고뇌가 아니다.')한 탓에 「역행」의 차선에 그쳤다. 이에 다자이 오사무는 ‘작은 새를 키우고 무도회를 보러 다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은)그렇게나 훌륭한 생활인가? 찔러죽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라는 내용이 담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다.

 1935년 10월 회심의 역작 「다스 게마이네(ダスㆍゲマイネ)」를 발표, 틀림없이 제2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으나 제2회 아쿠타가와 상은 ‘수상작 없음’으로 결정된다. 다시 가마쿠라 해안에서 자살을 기도하나 실패한다.

 1936년 2월,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어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동년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고, 제3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오른다. 다자이는 자존심을 접고 심사 관련자들, 특히 적대관계였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도 사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가와바타 또한 ‘나는 예선후보작을 빠짐없이 읽었다. 이번에 적당한 후보 작품이 없다면, 다자이 씨의 특이한 재능이 수상해도 좋을 것이다’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제3회에서도 수상은 실패하고, 이후 아쿠타가와 상 후보 선정 기준에 ‘한 번 후보에 오른 작가는 다시 후보로 선정하지 않는다’라는 규정이 생기며 다자이는 두 번 다시 아쿠타가와 상을 노릴 수 없게 된다.

 1937년, 다자이는 친척으로부터 자신의 내연녀 코야마 하쓰요(小山 初代, 1912.3.10~1944.7.23)와 간통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듣게 되고, 하쓰요와 함께 다시 안정제를 이용한 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이후 1년간 펜을 꺾는다.

 1938년 11월 중매를 통해 이시하라 미치코(石原美知子, 1912.1.31~1997.2.1)와 결혼한다. 이때 스스로 쓴 결혼 서약서에 ‘다시 파혼을 반복했을 때는 나를 완전한 미치광이로 여기고 버려주십시오.’라 쓰는 등, 과거의 자살시도를 반성하고 아내를 평생에 걸쳐 지키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었다.

 이듬해인 1939년 1월부터 고후(甲府)로 낙향. 동년 9월 도쿄부 미타카 시로 이주해 살며 정신적으로 안정된 다자이는 2차대전이 심화되어 가는 혼란한 와중에도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1940), 「유다의 고백(駆け込み訴へ, 한국에는 '직소'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됨)」(1941), 「후지백경(富嶽百景)」(1943), 「쓰가루(津經)」(1944)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일본이 패전한 후 스스로를 ‘멸망의 백성’이라 칭하며 '멸망의 노래를 할 것'을 신조로 재출발, 1947년 장편소설 「사양(斜陽)」이 호평을 받아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혹은 ‘무뢰파 문학’이라 불리게 된다.

 1941년 득녀, 1944년 득남(아들은 다운증후군을 앓았다), 1947년 3월 득녀, 동년 11월 애인 오오타 시즈코 사이에서 득녀.

 1948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인간 실격(人間失格)」 집필.

 「인간 실격」을 발표한 후인 1948년 6월 13일, 연재작이었던 유머 소설 「굿바이(グッド・バイ)」를 미완의 유작으로 남기고 애인 야마자키 토미에(山崎 富栄, 1919.9.24~1948.6.13)와 함께 타미가와(玉川)에 투신한다. 다자이를 둘러싼 연적(다자이의 딸을 낳은 오오타 시즈코)에게 보낸 토미에의 마지막 편지에는 ‘나는 슈우지 씨(다자이 오사무)가 좋아서 함께 죽습니다’라 쓰여 있다. 신발 등 투신의 흔적은 다음 날인 6월 14일에 발견되었다. 두 사람의 유체는 다자이의 생일이었던 6월 19일 오전 7시 경 투신현장에서 1km 거리의 하류에서 발견되었는데, 토미에는 격렬한 공포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다자이의 표정은 평온했다고 한다. 향년 38세.

 사망 50주기였던 1998년 5월, 유족들이 다자이의 친필유서를 공개했다. 다자이는 유서에서 아내 미치코를 두고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라 썼고, 또한 ‘소설을 쓰는 일이 싫어졌기에 죽을 것입니다’라며 자살의 동기를 설명했다.

 죽기 직전이었던 1948년에 발표한 소설 『앵두(桜桃)』와 연관 지어, 다자이 저택이 있는 이곳 아오모리 현 카나기 마치에서는 앵두 기일 행사(桜桃忌の行事)를 열어왔으나, 유족의 요망에 따라 탄생 90주년이 되는 1999년부터 ‘다자이 오사무 탄생제(太宰治生誕祭)’로 명칭을 바꾸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서 벽에 붙어있던 것이 바로 그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다.






 다자이 오사무 기념관에 공개된 여러 물건들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아닌 실존했던 인간 다자이 오사무를 상상하게 했다. 나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작가론에 대한 개인적 혐의와 비슷한 이유에서다.

 작가론은 꼭 필요하고 또 가치 있는 연구임을 이해한다. 위와 같은 연표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도 활발한 작가론적 연구 덕분이니, 문학자들의 노고에는 감사를 느낀다. 그러나 호불호를 말하자면 역시 싫다. 대학 시절, 작가론 발제를 할 때마다 내가 인위적으로 설정한 비좁은 방향성으로는 작가의 삶을 담아낼 수 없음을 느꼈다. 상허 이태준에게 내 멋대로 '당대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칭호를 붙여 발표했을 때, 나는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묘한 수치심을 느꼈다. 스스로의 가소로움이 측은했다.

 자신을 걸고 써본 사람은 안다. 작가와 작품은 끝내 개별의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더욱,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부디 자기보다 나은 존재이기를 갈망한다. 자식이 자기보다 나은 인간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다. 허나 작가론은 귀납적 방법을 앞세워 그런 바람과 발버둥을 거침없이 무시한다. 작가의 사생활과 지극히 사적인 대화, 비행, 일탈을 연구라는 미명 하에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도, 또 그에 근거한 귀납으로 작품의 해석방향이 결정지어지는 논리의 궤적도, 타당성과 유용성은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 역시 불쾌하다. 전자는 작가의 삶을, 후자는 작가의 작품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이 부자유는 후대의 독자에게도 돌아온다. 작가론이 자유로운 읽기를 방해하는 것이다.

 뛰어난 문예가의 삶이란 이토록 조각조각 해부될 수밖에 없는가. 작품이 뛰어난 작가라면 그 삶조차 모두의 흥미거리로 공유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 일인가? 누구의 의지가 우선되어야 하는가? 죽은 자의 존엄은 산 자의 호기심만도 못한 것인가? 복잡한 문제다. 카프카의 유언이 순순히 받아들여졌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수도 없었을텐데, 그렇다면 과연 내가 「성」과 「판결」을 우러르는 일은 카프카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인가. 누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좀머 씨로 만드는가. 데이비드 샐린저는 왜 자신의 전기를 쓴 문학자에게 소송을 걸어 끝내 편지만은 공개하지 못하도록 했는가. 작가론적 연구는 누구의 만족감을 위한 것인가.

 나는 모른다. 작가론에 대한 나의 혐의가 정돈되지 못한 반발심에 불과하다는 것만 알 뿐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풍경을 원했을까. 역시 모를 일이다.






















































 다분히 실례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끝내 '그가 과연 이것을 원했을까.'라는 문장을 방명록에 남겨두고 기념관을 나왔다. 그의 낙서를 보며 즐거움을 느낀 주제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건 명백한 이율배반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뒤숭숭한 심정 속에 참기 힘든 지점이, 뱉어내고 싶은 씁쓸함이 있었다. 나는 내가 남겨놓은 문장에 깃든 터무니없는 오만을 자책했다. 내가 다자이 오사무를 알긴 개뿔이나 안다고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한단 말인가. 스스로의 좁은 도량을 드러내고 있다는 시큰한 불안감에 가슴팍이 빠듯했다. 허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타부당이 명백해 아늑한 말글에만 파묻혀 살아갈 거였다면, 애당초 이런 엉망진창의 유랑은 떠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건너편의 기념품 가게에는 100가지가 넘는 다양한 종류의 상품이 비치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전병(센베) - 우마레떼 스미센베.
(먹 묵墨을 훈독으로 '스미'라 읽는다.)







 떫은 입맛을 다시며 나는 북서쪽을 향했다. 허기가 졌다. 허나 가까운 곳의 식당이라고는 기념품 가게에 딸린,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다자이 오사무에게 메뉴명을 하나씩 갖다붙인―예컨대 '다자이 오사무가 좋아했던 XXX가 듬뿍 들어간 라멘'하는 식― 가게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 것도 사먹고 싶지 않았다.











《B》



 시지미(재첩) 라멘이 일품이라던 쥬산코 부근의 라멘집 '와카야마(和歌山)'까지 휴식없이 갔다. 북쪽으로 갈수록 바람이 거칠어졌다. 도착 즈음에는 강풍에 이륜차가 차선 반 칸씩 밀려나곤 했다.








 허기가 심해서 곱배기로 시켰다.








 나는 평소 어패류를 싫어하는데도, 이곳의 라멘은 무척 맛있었다. 어릴 적 종종 먹었던 재첩국과 비슷한 종류의 따스함이 있었다. 추가로 밥을 시켜 말아먹었다.

 계산을 하며 여점원에게 쥬산코를 보기 좋은 지점을 알려달라고 했다. 점원에게 불려온 초로의 사장은 메모지를 꺼내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려가며 전망대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요는 '전망대가 나올 때까지 직진만 하라'는 내용이었지만, 쉬운 것도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친절이 고마웠다.








 라멘집 '와카야마'는 거대한 호수 쥬산코가 서쪽의 바다로 흘러나가는 하구에 있었다. 아마 내 고향의 낙동강 하구처럼 이곳의 물도 조수간만에 따라 함수와 담수가 오르내리며 세력전을 펼칠 터였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재첩을 잡을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아파트 단지의 새벽을 깨우던 '재첩국 사이소' 아저씨를 떠올렸다. 그가 팔던 재첩을 먹던 나는 젊은 날을 헤매다 동쪽의 열도까지 흘러왔다. 내가 먹던 재첩을 팔던 그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호수가 강풍에 너울쳤다.








 나는 쥬산코의 서북쪽을 시계방향으로 달렸다. 도중에 '오오누마 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기에 변덕을 부려 따라가보았다. 하코다테 북쪽의 오오누마 공원이 누마(沼)라기엔 턱없이 거대했던 것에 비해, 여기는 그냥 조그마한 호수였다. 풍력발전기들이 조용히 돌아갔다.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곧 오늘만 유별나게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C》



 전망대는 쥬산코의 북쪽에 있었다.








 하늘이 흐려 호수 또한 흐리게 보였다. 18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호수는 끝자락만 겨우 보였다.







 좌측에 보이던 검은 점을 향해 줌렌즈를 겨누었더니, 흑우였다.







 어렴풋이 바다가 보였다.








 전망대를 내려와 시계방향으로 호수의 북쪽을 계속 돌았다. 길가에 조형물이 있었는데, 아마도 '산노'라는 것인 듯했다. 도리이와는 다른 의미의 조형물이라 들었는데 상세한 설명은 볼 수 없었다.








 동쪽으로 1km 정도를 가자 언덕 위에 미치노에키 쥬산코 고원 전망대(道の駅十三湖 高原展望台)가 있었다. 계단을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4층 높이의 전망대에는 특이하게도 길다란 미끄럼틀이 설치되어 있었다. 뜬금없었지만, 비좁은 전망대에 내려가는 길을 따로 내둔 건 나쁘지 않은 발상인 듯했다.








 쥬산코의 동북쪽 끝자락에 도달해보니, 호수의 끝은 메말라있었다.








 본래는 이 안내판처럼 물이 가득한 곳이었을 것이다.















 쥬산코를 떠나 남쪽으로 달렸다. 낯선 길을 달리다 어째 풍경이 좋은 호수가 있기에 잠시 쉬며 사진을 찍었다. 찍고나서 다시 보니 지난 밤을 보낸 바로 그 호수였다.










《D》



 죠몬 시대(중석기 내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샤코우키 토구우(遮光器 土偶, 차광기 토우) 모양 장식이 붙은 키즈쿠리 역(木造 駅)에 들렀다. 듣기로는 이 역에 열차가 들어오면 토우의 눈이 빛난다고 했다. 역으로 들어가 시간표를 살펴보았다. 양쪽 선로를 합쳐 하루 25회 밖에 차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마침 20분 후에 아키타 행 열차가 들어올 듯했다. 나는 잠시 역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세면도구와 수건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안을 했다.

 개운한 기분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더니 밖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산 이륜차 커버를 꺼내 허겁지겁 차를 덮고, 전자기기가 든 가방만 분리해 역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교복 차림의 학생들 예닐곱 명이 허둥거리는 나를 잠깐 쳐다보았다. 나는 대합실 벤치의 가장 구석자리로 가서 앉았다.

 기차 도착 3분 전부터 사진기를 들고 역 앞에서 기다렸지만, 떠나가는 기차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도 토우의 눈은 빛나지 않았다. 이 또한 도호쿠 대지진의 영향인가 싶었다.

 힘도 빠지고 해서, 나는 한동안 역에 앉아 빗발이 가늘어지길 기다리며 몸을 쉬었다. 약 1시간 후 겨우 비가 그쳤다. 나는 구글 네비게이션 앱에 '히로사키 성'을 목적지로 입력한 후 다시 남쪽을 향했다.










《E》


 
 구글 네비게이션 앱은 나를 히로사키 성의 7번 출구인 '공업고등학교 앞 출입구(工業高校口)'로 안내했다.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는지라 따로 입장료를 받거나 하진 않았다. 바깥 해자 주변에는 벚나무가 많았다. 여기도 봄에는 굉장한 벚꽃 명소겠구나 싶었다.








 화장실 건물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기 좋았다.








 흐린 저녁의 습기가 성 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누르고 있었다.








 히로사키 성(弘前城)은 일본의 국가사적으로서, 에도시대에 지어진 천수각과 망루 일부가 현존하고, 해자 등 성의 전체적인 윤곽이 폐성되던 당시의 형태대로 보존된 곳이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는 유작이 된 기행문 「가도를 가다」에서 이곳을 '일본의 7대 명성'이라 평한 바 있다. 초대의 천수각은 벼락에 의해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소실되었는데, 지금도 그 터의 돌담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에도시대에 지어졌다는 천수각의 사진을 찍었다. 높이가 15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건물이었다. 현존하는 12채의 중세 천수각 중에 가장 낮은 것이라 한다.







 성은 상당히 넓었다. 여러 구역을 몇 개인가의 물길이 나누고 있었다.







다가가서 "이야, 그림 좋다?"를 시전해줘야 할 것 같다.









 일본에서는 보통 공원에서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되어 있다. 다른 공원 이용자에게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내려서 끌고가는 것이 기본 매너로 통한다. 헌데 이곳에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들이 종종 보였다. 규칙이 다른 건지 말썽꾸러기들이 많은 건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자전거를 탄 한 무리의 학생들이 굉장한 속도로 내 옆을 스쳐가더니 다리를 넘어갔다. 직각의 길을 너무 안쪽으로 돌려고 하기에 각도상 틀림없이 물을 밟고 미끄러질 듯 보였는데, 그들은 전원 태연하게 다리를 돌아나갔다.








 자전거가 지나간 다리 위에서 해자를 바라보았다. 곧 밤이었다. 오늘은 어디서 자야할지 막막했다.

















 시내를 조금 헤매다가 히로사키 시를 벗어났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자정을 지났지만 마땅한 잠자리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추적거리는 부슬비가 피로를 더했다. 어느 주유소를 기점으로 가로등밖에 없는 도로만 계속되었다. 배가 고팠지만 식당도 편의점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졸음이 겨워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차가 휘청거리는 통에 깨어났다. 표지판에는 듣도 보도 못한 지명만이 이어졌다.

 문득 커다란 고가도로가 나왔기에 별 생각없이 올랐다. 문득 고가도로 아래에는 빈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가도로를 넘어가 차를 돌렸다. 도로에서 벗어나 둘러보니 생각보다는 민가가 많았는데, 불빛이 켜진 집은 한 곳도 없었다. 기둥 주변에는 주차선이 그어져 있었고, 대부분의 공간에 차가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공용주차장으로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곳이라면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 듯 싶었다. 나는 주변을 두어 바퀴 돌다가 적당한 자리에 차를 세우고, 그 옆에 나란히 텐트를 설치했다. 자잘한 짐은 모두 이륜차의 짐칸에 올린 후 아침에 구입한 이륜차 커버를 씌우고, 고무 짐끈으로 짐의 위를 눌러 고정시켰다. 이만하면 비나 바람에도 괜찮을 듯 했다.

 가지고 있던 생수로 간단히 얼굴과 손발을 씻고 텐트로 들어가 누웠다. 휴대전화를 꺼내 6시에 알람을 맞추었다. 늦잠을 자면 이런 구석진 곳에 텐트를 치는 보람이 없다. 낯선 외국인이 자기 동네에 텐트를 치고 누워 자고 있으면 불안이나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가능한 지역주민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노력은 해야 마땅했다.

 겨우 잠이 들려는데, 멀리서 가솔린 차량의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의 민가로 가는 것이겠거니 했다. 허나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급기야 내 텐트 부근에서 차가 섰다. 차는 내가 머리를 둔 방향으로 붉은 후미등을 조금씩 조금씩 접근시켰다. 경찰이구나, 싶었다. 부근의 누군가가 부랑자가 있다는 신고라도 한 모양이었다.

 차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나가서 상황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중장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 이거 참 곤란하게 됐네….

 틀림없이 나더러 들으라는 말투였다. 이 상황에서 '쏘지 마세요' 라고 하면 웃기려나 싶었다. 지퍼를 열고 나가보니 은색의 구형 도요타 비츠 옆에 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일단 사과부터 하고 양해를 구하려 했는데, 오히려 상대방이 먼저 사과를 해왔다.


- 아유, (잠을)방해해서 미안해요.
- 아닙니다. 제가 죄송하죠.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이륜차로 여행중인데, 하룻밤만 이 고가도로 아래에서 비를 피하려 했습니다.
- 그렇군요. 정말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괜찮으시면 텐트를 조금 옆으로 옮겨주시면 안될까요?

 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아주머니가 설명을 계속했다.


- 이 칸은 저희가 관청에 돈을 내고 빌리는 곳이거든요. 저희도 여기가 아니면 주차할 자리가 없어요. 보통 여기서 주무시는 분들은 저쪽 기둥 옆을 쓰시던데, 대단히 송구하지만 텐트를 저쪽으로 옮겨주실 수 없을까요? 부탁드립니다.
- 아, 물론이죠. 모르고 함부로 텐트를 쳐서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옮기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차를 옆의 개울가로 옮기고, 텐트 또한 달랑 들어올려 아주머니가 말한 기둥 옆으로 옮겼다. 일본에서는 차량 수만큼의 주차공간(차고)이 없으면 차를 구입할 수 없는 법률이 있다. (불법주차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차고지 증명 제도였고, 그 성과는 상당하다.) 따라서 '여기가 아니면 주차할 곳이 없다'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참말일 것이다. 그보다 노숙자에게 이토록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또한 '보통 여기서 주무시는 분들'이라는 말은, 나처럼 텐트를 치고 하룻밤 묵어가는 여행자가 드물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상식이 다르구나, 싶었다.


- 여기면 괜찮을까요?
- 네, 충분해요. 이제 주차할 수 있겠네요. 옮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닙니다. 민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날이 밝으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그 와중에 텐트로 들어가버리기도 머쓱해서, 나는 아주머니가 주차를 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민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다시 텐트로 들어가 누웠으나, 상식이 깨진 직후라 그런지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겨우 잠이 들려던 어느 순간, 이번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거대하고 엄청난 굉음이 텐트를 뒤흔들었다. 나는 기겁했다. 지진인가? 폭격인가? 화산의 분화인가? 발작하듯 자신의 몸을 더듬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곳도 다치지 않았고, 텐트 밖의 불빛 또한 전혀 변화가 없었다. 잠시 후 굉음이 멀어지는 소리를 통해 나는 겨우 상황을 파악했다. 그것은 기차의 소리였다. 나는 밖으로 나가보았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불과 2, 30 미터 거리에 철로를 둘러싼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고가도로 자체가 이 철로를 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잠자리를 잡아도 이런 곳을 골랐을까. 이런 시각까지 저런 굉음을 내며 기차가 다니다니, 이 부근의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사는 걸까….

 너무 놀란 탓에 힘이 빠졌다. 이런 곳에서 잘 수 있을까. 이제와서 다른 곳으로 옮길 기력은 없었다. 나는 텐트를 기둥 뒷편으로 다시 옮긴 뒤, 가방에서 오렌지색 3M 이어플러그를 꺼내들고 다시 텐트로 들어갔다. 제발 방금 지나간 것이 마지막 기차이기를 바라며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후 기차는 최소 두 번은 더 지나갔다. 자그마한 귀마개는 기차의 굉음에 무력했다. 나는 불쾌감에 헐떡이다가 어느 순간 혼절하듯 잠에 빠졌다. 겨우 8일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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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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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7 03:41
고생하셨네요. 잘보고 있습니다~
라라 안티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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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7 08:37
앗, 저도 다자이 오사무와 인간실격 참 좋아하는데...조금 후에 여유되면 꼭 정독해야겠습니다.
Mosch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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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7 08:59
잘 읽었습니다. 노숙할 자신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의 여행을 해보고 싶네요.
Nao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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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7 10:25
잠깐 들어왔다가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었습니다.
작가의 삶을 준거로 삼아 작품을 해부하는 것은 여러모로 이상한 기분을 들게하죠. 개인적으로 작가에게도 작품에게도 못할 짓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삶이 드라마틱한 경우에는 특히나 그의 작품들을 지나치게 그의 삶과 연계지어 보려고 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때로는 '작가의 어떠한 삶의 지점과 경험들이 어떠한 인식을 밝혀 주었겠구나'하는 정도에서 작품을 새롭게 보게 해주는 측면은 긍정적일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모쪼록 간접적으로나마 다자이 오사무의 삶의 편린을 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앞으로의 유랑담도 기대하겠습니다.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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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7 14:19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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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7 14:22
저도 좋아합니다. 「인간 실격」은 불후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문학적 가치를 따지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작품에는 없는 굉장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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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7 14:27
감사합니다. 약간 무리해서 특이한 텐트를 사가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땅바닥에 누워 자는 것보다는 훨씬 좋더라구요.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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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7 14:47
빠져들어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론에 대한 혐의는 사실 스스로도 생각이 정돈되지 못한 부분인지라 쓰기 곤란했습니다. 저 역시 까뮈, 카프카, 윤동주, 하루키, 레이몽 라디게 등 좋아하는 문예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고, 그러한 작가론적인 근거를 통해 작품을 보다 더 깊게 이해하려 애쓰는 주제에 저런 혐의라니…. 자가당착이긴 하지요. 부드럽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라라 안티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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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8 00:25
윽...장문의 댓글을 달다가 컴이 다운되버리는 비극을 맞았네요. ㅠㅠ

문학적 가치는 제가 뭐...원문을 읽어봤거나 일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라서 평하지는 못하겠구요.
어차피 전 외국어가 안 되서, 번역으로 재창조된 그의 작품을 읽는것이라서...
그래도 하루키나 일본에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꼽는 최고로 존경하는 작가로 꼽히는데다, 기묘한 행적과 요절 등 천재의 요소를 꽤나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연필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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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9 01:04
인간실격이라...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Ti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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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9 03:26
개인적으로는 가능한 젊을 때 일독할 것을 권하는 작품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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