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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5/08 23:38:09
Name   Tigris
Subject   유랑담 약록 #02 / 120603日 _ 샤코탄의 곶, 오타루의 전망대









《A》

 까마귀 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텐트를 기어나와 물건들을 챙겼다. 가방도 차도 모두 무사했다.

 날이 흐렸다. 해안을 둘러보니 낚시하던 부부의 텐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들이 피웠던 불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세안제를 챙겨 터벅터벅 화장실로 향했다. 불편한 잠자리와 의지할 곳 없는 신세, 그리고 6시 반쯤 깨어나서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세수하러 가는 나…. 어째 군대 생각이 났다.

 세수를 하고 나오는데, 지난 밤 수돗가 부근에 세워진 텐트에서 지이이익, 하며 지퍼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텐트 안에서 건장한 백인 남성이 나왔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오른손을 들고 "Good morning."이라 말했다. 그도 "Good morning." 하고 대답했다.

 그는 간단히 세안을 하더니, 포트에 담아온 온수로 인스턴트 스프를 만들어 먹었다. 나는 잠자리를 정리하며 그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다가, 다가가서 말을 붙였다. 늘 그렇듯 엉터리 영어라도 어떻게든 간단한 의사소통은 되었다. 내가 한국인이며 이륜차 여행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그도 자신이 러시아인이며,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의 어느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고, 몇 년에 한 번씩 홋카이도에 와서 도보와 버스만으로 여행을 한다고 소개했다. 무엇을 가르치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알아듣지 못했고, 다만 history라는 단어가 언뜻 들리기는 했다.


- 오늘은 이 부근에 있는 온천에 갈 겁니다. 곧 버스가 올 거예요.

- 그렇군요. 도보여행이라니, 체력이 대단하시네요.

 그가 지식인층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마침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에게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섬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시 영토분쟁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아듣고, 한국와 일본 사이에도 영토에 관한 마찰이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북방영토가 언젠가 일본에 반환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러시아 사람들도 흔히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마 그럴 거라고 했다.


- 결론적으로 말해 일본에 돌려주는 게 옳겠지만, 정치적 사안이 얽혀 있어서 복잡하죠. 아마 긴 이야기가 될텐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제 곧 이 부근을 지날 버스를 타야합니다. 여긴 버스가 드물어서 놓치면 곤란해요.

- 버스라니, 저거 말인가요?

 나는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던 버스를 가리켰다. 그는 "오우!"하는 외마디 감탄사를 남긴 채 작은 배낭을 챙겨들고 달려갔다. 다가온 버스는 (일본의 버스가 흔히 그렇듯) 정류장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잠시 정차했고, 그는 겨우 버스를 잡아탔다. 나는 터벅터벅 도로 쪽으로 걸어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도 숨을 몰아쉬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무도 없는 해안은 아늑했다. 나는 텐트를 반 접어 의자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넷북을 꺼내 지금까지의 일을 기록했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부터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했다. 지도상으로는 서쪽에 곶이 하나 있는 듯했다. 우선 거기에 가보기로 했다. 아무 것도 없으면 바다나 보고 오면 된다. 나는 가방에서 편의점 봉투를 꺼냈다. 메론빵과 소보로빵과 우유가 남아있었다.

 어디선가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왔다. 까마귀는 종종걸음으로 1시 방향에서부터 7시 방향으로 반시계방향의 원을 그리며 내 시선을 끌었다. 넌 뭐냐, 싶어서 쳐다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푸다닥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다른 까마귀 한 마리가 메론빵이 든 편의점 봉투를 물고 날아가고 있었다. '팀플레이?' 반사적으로 까마귀를 쫓아 뛰었다. 쓰레기를 함께 담아둔 봉투가 무거웠는지 까마귀는 높이 날지 못했다. 건물 뒤로 날아가기에 쫓아갔더니, 푸더덕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시커먼 것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날아갔다. 아까 내 시선을 끌던 놈이 어느새 돌아서 날아온 모양이었다. '또 팀플레이냐….'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두 까마귀 중 하나가 메론빵을 물고 있었고, 까마귀가 날아간 자리에는 쓰레기 봉투만 남았다.

 쓰레기를 챙겨 텐트로 돌아왔다. 황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나는, 이걸 뭐라 기록하면 좋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넷북에 ‘메론빵을 보시했다’라 써넣었다.









 얼마 후 날이 개었다. 나는 짐을 챙기면서도 아쉬웠다. 영토분쟁에 관해 러시아인의 사견을 들을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나는 e-mail주소를 써둔 명함을 한 장 꺼냈다. 그리고 '당신의 의견을 상세히 듣고 싶다. 괜찮다면 메일을 달라. 좋은 여행이 되기를.'하고 써서 그의 텐트에 걸려있던 빨래집게에 꽂았다.








《B》

 서쪽을 향했다. 곶岬이라 되어 있는 표지판을 따라 언덕을 올랐다. 널따란 주차장이 있었고, 국정공원 카무이 곶(国定公園 神威岬)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카무이는 아이누 말로 신神이라는 뜻이니, 우리말로 풀면 신갑이나 신의 곶 정도가 될 듯했다. 주차장 둘레를 따라 주변의 바다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다시 낀 먹구름 탓에 바다는 잿빛이었다. 멀리서 4기통 이륜차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와인색 혼다 호넷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부서지는 파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산책로 입구로 갔다. 곶의 산책로는 대략 삼각형 모양이었다. 나는 안내도에 표시된 방향을 따라 우선 여인금제의 문(女人禁制の門)을 향해 걸어갔다. 언덕을 오르니 라이딩웨어 차림의 한 여성이 문으로 들어가진 않고 휴대전화로 사진만 찍고 있었다. 아까의 호넷을 타고 온 사람인 듯했다. '설마 금녀라는 조건이 지금까지도 유효한 건가….' 영성이 메마른 나 같은 자에게 신앙이란 해당종교의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기상천외한 것이다.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 저기, 이 간판의 문구 말이죠, 여성은 들어가면 안된다는 뜻입니까?

- 원래는 그런 뜻이에요. 하지만 옛날의 이야기고, 지금은 상관없어요.







 나는 그녀와 함께 말을 나누며 산책로를 걸었다. 내가 어떻게든 대화는 할 수 있지만 일본어 읽기는 영 서투르다고 하자, 그녀는 마치 유치원생을 인솔하는 선생님처럼 곳곳의 안내문을 하나하나 소리내어 읽어주었다. 고대 지방수장의 딸이었던 챠렌카라는 여성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를 연모하여 쫓아왔다가 그가 이미 바다를 건너가버린 것을 알고 바다에 몸을 던져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이곳은, 챠렌카의 질투로 인해 여성을 태운 배가 모조리 전복되는 바람에 금녀의 땅이 되었다고 했다. 산책로의 한쪽 끝에서 내려다보이던 ‘넨부츠(염불) 터널’의 안내도도 그녀가 읽어주었다. 20세기 초 등대지기의 가족이 파도에 휩쓸려 사망한 사고를 계기로 터널을 만들었는데, 양쪽에서 동시에 파들어가던 도중 서로 방향이 틀어지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마을 사람들이 염불을 외우고 종을 울려서 그 소리를 통해 방향을 잡아 겨우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흔적으로 인해 터널 내부의 길은 두 번 꺾여있고, 그 바람에 터널 내부가 깜깜하여 ‘염불을 외우며 지나가면 안전하다’라는 설명이 덤으로 붙은 곳이라고 했다. 허나 현재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가볼 수 없었다.
















 산책로를 내려오며 우리는 잠깐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겉보기에 서른도 채 안된 듯 했던 그녀는, 사실 두 아이를 둔 어머니이고, 삿포로 시 테이네 구에 살고 있으며, 지금은 휴일을 맞아 아이를 잠시 친정에 맡겨두고 바람쐬러 나온 거라고 했다. 이제 바로 아이들을 데리러 삿포로에 돌아가야 하지만, 아침 일찍 샤코탄까지 달려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도 이 즐거움은 역시 포기할 수 없더라구요.’라고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라는 말을 하기엔 너무 젊어보인다고 말했다. 확실히 삿포로에 사는 동안 위화감이 들 정도로 '젊은' 어머니들을 자주 본 나로서는 일본의 젊은 어머니들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역시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싶어서 그만두었다. 그녀는 ‘남편’이나 ‘애들 아빠’ 같은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우리는 주차장에 내려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 이륜차를 보더니 오랜만에 보는 PS250이라며,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시라 하고, 대신 나도 사진을 한 장 찍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다시 길로 돌아온 나는 해안을 따라 동쪽을 향했다. 별 생각없이 가고 싶은대로 달리다가, 표지판에 샤코탄 곶(積丹岬)이라는 글자가 보이기에 다시 따라가보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마주지나가는 이륜차 운전자들이 자주 보였다. 언제나처럼 서로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C》




 샤코탄 곶 주차장에서 좁고 낮은 보행용 터널을 지나자 전망대가 있었다. 나는 한쪽 난간에 걸터앉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빛이 좋았다. 나는 겨울의 남해를 가장 좋아하는데, 전혀 다른 인상의 이 바다 또한 마음에 들었다. 카누를 타고 맑은 바다 위를 흘러가는 이들은 즐거워보였다. 날이 잠시 개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오전 10시를 지나 있었다.









 부근을 둘러보며 걷다가 주차장으로 돌아오는데 근처 식당의 홍보판이 보였다. ‘샤코탄 출신 어머니의 맛’이라는 문구를 내세우는 그 가게는, 그릇 가득 노란 속살로 덮인 나마우니동(生성게덮밥)과 마찬가지로 붉은색으로 그릇을 한 겹 덮은 이쿠라동(연어알덮밥)이 주력메뉴인 모양이었다. 잠시 지갑사정과 미각적 만족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보았으나, 식성상 생선 외의 해산물에는 큰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냥 돌아섰다.











 다시 동남쪽으로 향했다. 이제 오타루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어제와는 다른 길을 택해서 해안을 따라 계속 달렸다. 홋카이도다운 규모의 거대한 밭도 있었고, 무성한 풀숲도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의 정상에는 아직도 하얀 얼음이 덮여있었다. 경관을 살피며 달려가는데, 인도로 덩치 큰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역민이 걸어다닐만한 길이 아닌지라 의아해서 쳐다보았더니, 아침의 그 러시아인이었다. 나는 우연에 놀라며 급히 차를 세웠다. 그도 나를 알아보고 돌아서서 걸어왔다. 그는 온천을 마치고 다시 텐트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 텐트를 그렇게 내버려둬도 괜찮습니까?

- 괜찮아요. 아무도 건들지 않아요.

 빨래집게에 명함을 꽂아두었으니 아까 이야기하던 영토갈등 문제에 대해 메일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알겠다고, 기꺼이 메일을 쓰겠다고 말하고, 자신의 이름이 줄리앙이라고 했다. 나도 Yoo라고 이름을 밝혔지만 그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You? Yoo? Your name is Yoo?" 듣고보니 나도 좀 웃긴다 싶어서 영어이름을 다시 알려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좋은 여행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그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텐트까지는 족히 15km는 될 것이었다. 나는 멀리서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었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앞으로 영어로 이야기할 때는 이름을 ‘류’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안선을 따라 가다보니 어제 저녁식사를 위해 달려왔던 마을이 나타났다. 낮에 다시 내려다본 마을은 제법 규모가 컸다. 서쪽으로는 그럴싸한 온천료칸이 보였고, 동쪽에는 중학교의 거대한 운동장에서 야구부의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미 1시간 전부터 연료계의 바늘이 붉은색까지 내려가있었던지라 주유소부터 찾았다. 택시조차 보기 힘든 이런 벽촌에서 차가 서버리기라도 하면 정말이지 대책이 없었다. 다행히 마을 끄트머리에 지붕도 없이 낡은 주유기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는 주유소가 있었다. 기름때 낀 모자를 눌러쓴 노인이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다가 주유기 쪽으로 들어서는 이륜차를 보고 느긋하게 일어섰다. 주유소 어디에도 요금안내판이 없긴 했지만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레귤러 천 엔을 주문했다. 낡은 주유기는 기름을 토하는 내내 삐그덕거렸다. 주유가 너무 빨리 끝나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노인이 갖다준 영수증에는 리터당 요금이 214엔으로 찍혀 있었다. 어제 삿포로를 떠나며 넣었던 기름은 리터당 140엔이었다. 황당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주유소 드문 동네에 기름값 비싼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 한 번은 주유해야 하는 처지인만큼, 앞으로는 도시를 지날 때마다 주유도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D》


'welcome 요이치 우주기념관 스페이스 동몽(童蒙)'



 오타루로 돌아오는 도중 요이치(余市) 시 미치노에키(道の駅. 휴게소 같은 곳. 식당이나 화장실을 갖추고 있으며 지역특산품을 팔기도 한다.)에서 잠시 쉬었다. 딱히 맛있어 보이는 게 없어서 근처 세븐일레븐으로 걸어가 치즈버거와 ‘1일분의 야채’ 주스를 사먹었다. 가만보니 그 동네는 뭔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이래저래 돌아다녀보니 미치노에키 부지 안에 우주기념관이 있질 않나, 동네 온천조차 우주왕복선 모형을 달아두는 등 어째 우주와의 연관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우주기념관 입구에서 요이치 시가 일본인 우주비행사 모리 마모루(毛利 衛, 1948~ )의 출신지라는 설명을 읽고서야 뭔가 납득이 되었다.











 이후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방파제를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했다. 담벼락 옆만 따라가다보니 문득 여기가 어딘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를 세우고 벽을 기어올랐다. 거대한 테트라포트가 무수히 매립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낮의 태양을 한껏 머금은 바다가 시린 색으로 빛났고, 저 멀리 모래로 된 해수욕장에서는 젊은이들이 여름을 즐기고 있었으며,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내게는 파도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껏 떠들썩하게 여름을 즐기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더니 문득 무언가 기괴한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개별 공간에 유리遊離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차에 올랐다. 오타루로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정했다. 목울대 왼쪽에서부터 귀까지 이어지는 동맥이 부자연스럽게 박동했다. 해안가의 길이 끝나자 다시 큰 도로로 합류했는데, 차가 오는 것을 못보고 차선을 바꾸다 사고를 낼 뻔했다. 일본에서 운전하며 처음으로 나를 향한 클락션 소리를 들었다. 나는 비상등을 점멸시켜 미안함을 표했다.








《E》






 오타루에 도달한 것은 14시 40분 경이었다. 나는 JR오타루 역을 지나 지고쿠자카(地獄坂, 지옥 언덕)를 올랐다. 오타루 상업고등학교가 보일 즈음에 우측으로 아사히 전망대를 향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끝에 주차장이 있었다. 나는 차를 세웠다. 전망대로 이어지는 숲길로 걸어갔다. 여기만은 꼭 오고 싶었다는 생각이 7할, 동시에 역시 여기에는 오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이 2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만은 와야했다는 생각이 1할 쯤 드는 모순이 혼란했다. 나는 잠자코 걸었다.









 처음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풍경이 보였다. 「최종병기 그녀」에서 몇 번인가 보았던 그 전망대였다. 죽은 친구의 마지막 미소가 떠올랐다. 친구가 '괜히 한 번 보고 싶다'던, 그 풍경이었다.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다운 전망이라 참담했다. 오타루로 오는 내내 마음 속에서 출렁이던 무언가가 비로소 넘쳤다. 언젠가 한 번은 이곳에 와야 할 것 같아서 홋카이도에 살았다. 그러나 10개월을 미루다가 홋카이도를 떠나기 직전에야 겨우 이곳에 왔다. 생각이 많아져 자꾸 눈이 감겼다. 나는 가끔 눈을 뜨며 풍경을 보았다.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상념은 막아지지 않았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나의 친구는 예정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친구는 의연했다. 인간은 품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친구를 통해 배웠다. 까뮈가 상상해보아야 한다고 역설했던 ‘행복한 시시포스’가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친구는 우연히 접한 「최종병기 그녀」라는 만화를 애호했다. 친구는 그 만화를 두고 ‘예정된 죽음을 앞둔 소녀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어떻게 행복으로 채워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나는 그런 만화가 아니었던 거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조심하느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예정된 죽음은 차분히 찾아왔고, 친구는 불가사의한 미소를 남기고 죽었다. 3주기 즈음 그 만화를 다시 읽었다.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기분으로 읽었을까. 몇 달간 골몰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에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스무 살을 나는 이미 지나쳐있었다. 계속 살아가는 나는, 그저 산 자의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

 역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인간이란 대체 뭘까. 나같은 범속한 잡것도 인간이고, 그도 인간이다. 그 간극은 거의 신비이며, 동시에 계속 살아가는 자에게 치욕이다. 치욕이되, 실로 덧없고 막막한 치욕이다. 이제는 그것을 치욕이라 불러도 되는지조차 모르겠다. 허나 이 선명한 전망대의 풍경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 군복무를 마치기까지의 치욕스러운 시간을 뛰어넘어, 이미 심연에 침잠한 줄 알았던 그 마지막 미소를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끄집어냈다. 그저 시간만 흐른다고 모든 것이 소화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늘이 새파랬다.













 멀리서 여객선의 기적이 울었다. 나는 넷북을 꺼내 글을 썼다. 우스꽝스러웠다. 겨우 글쪼가리나 써대고앉은 자신이 너무 하찮아서 욕지기가 나왔다. 허나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겨우 언어라는 조그마한 틀로 세상을 규정하려는 시도의 덧없음과,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달리 도리가 없어 글이나 붙들고 늘어지는 불우함을, 아니 어쩌면 불모라고 해야 마땅할 이 삶의 방식을 비관하면서도, 나는 글을 썼다. 포기되지 않는 무언가를 좀 더 박하게 밀쳐내기위해 나는 썼다. 자판을 타고 흘러내리는 글은 대부분 인간이 자기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것은 문장으로서 형편없었지만 그나마 솔직했다.

 글로 된 구토가 멎어들자, 마음에 정말 구토를 쏟아낸 것 같은 허전한 편안함이 들었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 가벼운 기분으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오타루는 북동쪽을 향한 도시였기에 해가 기울어도 바다는 붉어지지 않았다. 나는 돋아난 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몇 시간이고 서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밤의 대지는 살아있는 자들이 제각기 빚어낸 빛으로 꿈틀거렸다.













 오랫동안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문득 강江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낮과는 다른 성격의 유리감이었다. 달빛에 푸르게 젖은 도시는 관능적으로도 보였다. 감정적 고조가 가라앉지 않아 과장된 기분이 드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나는 아사히 전망대를 내려왔다.




 20시가 넘었다. 이제 적당히 배를 채우고 길을 재촉해야 할 시각이었다. 따뜻한 것을 먹어두고싶어 라멘집을 찾아갔으나 이미 문이 닫혀있었다. 잠시 길을 따라 돌아다녔는데 웬만한 가게는 폐점했고 그나마 ‘와라쿠(和楽)’라는 회전초밥집이 아직 영업중이었다. 도호쿠 지방으로 내려가면 당분간 생선초밥은 못 먹을 듯 싶기도 해서,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소문난 오타루의 초밥을 한 번 먹어보기로 했다.

 넓고 깨끗한 가게였다. 계란말이 등 가장 싼 접시는 120엔, 연어나 고등어, 다랑어 등은 290엔 정도였다. 과연 맛이 좋았다. 한창 먹는데, 점원 일동이 크게 뭔가를 외치더니 더 이상 벨트에 스시가 올라오지 않았다. 아마 영업종료를 예정하는 구호였던 모양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세 접시를 더 주문해 마저먹고 계산했다.







 식사를 마친 후 인터넷으로 테이네 구에서 잘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최소한 삿포로 같은 대도시에서는 노숙을 피하고 싶었다. 마침 테이네 구 면허시험장 부근에 인터넷카페(일본식 PC방)가 있었다. 나는 그곳을 구글 네비게이션의 목적지로 설정한 후 느긋하게 달렸다. 밤바람이 차기도 했고, 또 야간정액요금을 적용받기 위해서는 일찍 도착해봐야 허사였기 때문이다. 전날 낮에 달려온 길은 밤이 되자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보였다.








《F》

 도착한 곳은 전국에 체인망을 두고 있는 지유쿠칸(自遊空間)이라는 넷카페의 테이네 지점이었다. 짐을 이륜차에 두기가 꺼려져서 웬만한 짐은 몽땅 들고 들어갔다. 직원이 짐을 짊어진 나를 보고 황당해하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나이트팩(야간 정액요금) 적용이 가능한지 물으며, 넷카페는 처음이라 이용 설명을 듣고 싶다고 덧붙였다. 안내는 무척 건성이었는데, 아는 게 없으니 자세히 물을 수도 없었다.

 신분증을 내고 회원카드를 발급받았다. 8시간 나이트팩은 1,500엔이었는데, 그 정확한 적용시각을 물었으나 직원이 얼버무렸다.


- 지금 들어가시면 나이트팩이 적용되구요, 퇴장하시는 시각 기준으로 가장 저렴한 옵션에 맞춰 계산해드리니 안심하고 이용하셔도 됩니다.

 이어 직원이 어떤 자리를 쓰겠냐고 물었다. 차이를 몰라서, 대충 게임이나 하다 쉬자는 생각으로 인터넷 게임 좌석을 받았다. 직원을 따라갔다. 한국의 PC방과는 전혀 다르게, 매 자리마다 칸막이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칸막이의 문도 여닫을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비록 위는 뚫려있더라도 일단 문만 닫으면 밀실에 준하는 개인공간이 되는 식이었다. 헌데 인터넷 게임용 좌석은 너무 좁았다. 가방 놓을 자리도 없을 듯 보였다. 더 넓은 칸은 없냐고 물었더니 스펀지 바닥재를 싸구려 인조가죽으로 감싼 좌식 칸으로 안내되었다. 거기라면 짐을 베개 삼아 어찌어찌 새우잠은 잘 수 있을 듯했다.

 칸이 정해지자 직원은 넷카페 내부의 시설을 간단히 안내해주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만화책들과, 구석에 있는 샤워실과 세탁실, 그리고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음료대 등이 있었고, PC공간과 구분된 오락공간에는 오락실, 볼링장, 당구장, 노래방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짐을 두고 우선 샤워를 했다. 그리고 입고있던 옷들을 세탁실로 가져갔다. 샤워실은 유료였지만, 드럼 세탁기 세 대가 놓여있는 세탁실은 세제까지도 무료였다.

 건조까지 세팅해서 세탁기를 돌려놓고, 나는 만화책이 가득한 책장을 둘러보았다. 자고 싶었지만 공용 세탁기에 내 세탁물을 마냥 넣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책장에는 연령대의 구분 없이 그저 히라가나순으로 모든 만화책이 꽂혀있었다. 어차피 진득하게 한 편을 다 보기도 힘들 듯 싶어서 소년 매거진 등 만화잡지 몇 권을 챙겨 칸으로 돌아왔다.

 넷카페에 들른 김에 사진기의 메모리카드 용량을 확보해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PC를 켰다. 놀랍게도 펜티엄4급의 PC였다. 인터넷 게임 칸은 분명 '마비노기 영웅전', '테라' 등 3D 게임의 판촉물이 걸려있었으니, 아마 칸마다 PC 사양이 판이하게 다른 모양이었다. 우선 SD카드에 있는 사진을 하드에 옮기고, 그것을 다시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올렸다. 예상 전송시간이 4시간 정도로 나왔다. 밤새 켜두면 될 듯 싶었다. 업로드가 안정되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PC에 무엇이 깔려있는지 살펴보았다. 바탕화면에서부터 이미 AV 사이트와 연결되는 단축아이콘이 몇 개나 있었다. 스피커는 없었지만 헤드셋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화장실에도 AV의 대형 포스터가 몇 장이고 붙어있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란 말인가. 이 밀실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어쩐지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만화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칸막이가 얇아서 뒤척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래서야 원, 이 밀실은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쓸모가 없지 않는가….

 어디선가 발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문득 '이것도 산 것들의 냄새구나'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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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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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09 09:31
좋아요..
연필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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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0 15:09
좋아요2
곧내려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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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4 21:01
저도 여행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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