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7/02/20 18:58:20
Name 유유히
Subject [일반] [시 이야기]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중학교 시절, 도스가 깔린 학교 컴퓨터실에서 박두진의 "청산도"라는 시를 한메타자교사로 처음 접하였다. 그때는 여자아이들에게 먹히던, 류시화의 시편들을 탐닉하던, 말 그대로 중2병이 아니라 중2 시절이다. 그런 내게 저런 아저씨스러운 시가 매력적일 리 없었다. 하지만 이 글은 그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긴글 중에서 비교적 짧은 축이라 친구들 사이의 타자수 올리기 경쟁에 수월했다. 긴글 500타라는 넘사벽을 향하여, 나는 청산도를 치고 또 쳤다.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 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이상한 일이었다. 계속 치고 치면 칠수록 그 낡은 싯구들은 자꾸만 내 눈과 귀에 맴돌았다. 한번씩 읊어 보기도 했다.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반세기 전에 쓰인 옛날 싯구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래, 어쩌면 그런 사람이 만나도 지겠지. 운명같이.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나에게도 볼이 고운 사람이 있었다. 보고 지운 사람이 있었다. 눈이 맑고 가슴이 맑았다. 나의 사람...일 것이다. 아마도. 소유격은 꼭 소유해야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녀가 달밤이나 새벽녘에 홀로 서서 눈물이 어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날 위해 눈물 어리진 않았을 것이다. 나만을 위해 총총총 달려도 와 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볼이 고운 사람은 1949년에나 있었다구, 박두진 씨. 요즘 볼이 고운 사람들은 다 밤에 학원 마치고 유투브 뷰티 컨텐츠 보고 화장한다니까.

하지만 나는 청산도를 칠 때면, 그런 볼이 고운 사람이 나를 위해 눈물 어리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나를 위해 이슬밭 푸른 언덕을 달리는 나의 사람을 상상하곤 했다. 내 상상 속의 그 사람은 화사하고,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아, 고이 접어 나빌레라.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물결 같은 사람들이다. 그 중학생 시절에서 벌써 20년 가까이 흘렀다. 물결 같은 사람들은 물결 처럼 흘러갔고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사이를 난 헤엄쳤다. 사람들은 물결 같고 세월은 폭포가 된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리고 난 그린다. 너만 그린다. 어떻게 그리냐면, 혼자서 철도 없이 그린다. 이 층층이 더해가는 점층 묘사는 내 짧은 생 속에서 댓구를 찾기 어려울 만큼 애틋하다. 
===============================================================================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세월입니다.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은 어디 있을까요. 오랜만에 청산도를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 지운 나의 사람을.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7/02/20 19:19
수정 아이콘
별 헤는 밤과 더불어 한컴타자연습계 투탑이었죠..
나머지 작품들은 죄다 큰따옴표 붙어있어서 엄청 짜증났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별 헤는 밤이나 청산도나 좋은 시인데 망할 한컴타자연습이 애들 다 버려놨죠.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시를 단순히 타자속도 재는 용도로 써버렸으니 원.. ㅠㅠ
아니 오히려 그렇게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익숙해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eternity..
17/02/20 21:28
수정 아이콘
학창시절 컴퓨터 관련 수업 평가 중 ,일정 타수 이상 넘기기가 있었습니다. 평가 방법은 한메타자교사의 타자검정 기능으로 일정타수 (200여 타였던걸로 기억합니다) 넘기면 pass 하는 단순한 방식이었고, 당시 타자가 익숙치 않았던 저는 몇날 며칠동안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타이핑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덕분에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 완벽히 외우고 있네요...
할러퀸
17/02/20 22:52
수정 아이콘
정말 오랜만에 보는 시인데 덕분에 정독할 수 있었습니다.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좋은 시네요. 고전은 역시 정취가 있달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오클랜드에이스
17/02/21 00:03
수정 아이콘
한메타자 청산도... 알면 아재인가요?

옆에서 삼촌이 그거 치면서 연습했다고 하는데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344 [일반] 고인 뜻과 관계없이 형제자매에게 상속 유류분 할당은 위헌 [13] 라이언 덕후1294 24/04/25 1294 1
101343 [일반] 다윈의 악마, 다윈의 천사 (부제 : 평범한 한국인을 위한 진화론) [47] 오지의4157 24/04/24 4157 11
101342 [정치] [서평]을 빙자한 지방 소멸 잡썰, '한국 도시의 미래' [17] 사람되고싶다2258 24/04/24 2258 0
101341 [정치] 나중이 아니라 지금, 국민연금에 세금을 투입해야 합니다 [47] 사부작3491 24/04/24 3491 0
101340 [일반] 미국 대선의 예상치 못한 그 이름, '케네디' [59] Davi4ever8556 24/04/24 8556 3
101339 [일반] [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15] *alchemist*4569 24/04/24 4569 10
101338 [일반] 범죄도시4 보고왔습니다.(스포X) [41] 네오짱6529 24/04/24 6529 5
101337 [일반] 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결심했고, 이젠 아닙니다 [27] Kaestro5964 24/04/24 5964 16
101336 [일반] 틱톡강제매각법 美 상원의회 통과…1년내 안 팔면 美서 서비스 금지 [32] EnergyFlow4137 24/04/24 4137 2
101334 [정치] 이와중에 소리 없이 국익을 말아먹는 김건희 여사 [17] 미카노아3437 24/04/24 3437 0
101333 [일반] [개발]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2) [14] Kaestro2879 24/04/23 2879 3
101332 [정치] 국민연금 더무서운이야기 [127] 오사십오9738 24/04/23 9738 0
101331 [일반] 기독교 난제) 구원을 위해서 꼭 모든 진리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87] 푸른잔향4202 24/04/23 4202 8
101330 [일반] 교회는 어떻게 돌아가는가:선거와 임직 [26] SAS Tony Parker 2991 24/04/23 2991 2
101329 [일반] 예정론이냐 자유의지냐 [60] 회개한가인3813 24/04/23 3813 1
101328 [정치] 인기 없는 정책 - 의료 개혁의 대안 [134] 여왕의심복6287 24/04/23 6287 0
101327 [일반] 20개월 아기와 걸어서(?!!) 교토 여행기 [30] 카즈하2775 24/04/23 2775 8
101326 [일반] (메탈/락) 노래 커버해봤습니다! [4] Neuromancer842 24/04/23 842 2
101325 [일반] 롯데백화점 마산점, 현대백화점 부산점 영업 종료 [39] Leeka5940 24/04/23 5940 0
101324 [일반] 미 영주권을 포기하려는 사람의 푸념 [49] 잠봉뷔르8455 24/04/23 8455 99
101323 [일반] [개발]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1) [14] Kaestro3722 24/04/22 3722 8
101321 [일반] [서브컬쳐] 원시 봇치 vs 근대 걸밴크 vs 현대 케이온을 비교해보자 [8] 환상회랑2874 24/04/22 2874 5
101320 [일반] 이스라엘의 시시한 공격의 실체? [20] 총알이모자라27451 24/04/22 7451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