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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2/05 11:01:48
Name kimera
Subject 압도.
압도.


토요일 밤 11시 경 저는 친구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OO이냐?”

“왜? 나 바빠.”

“나 촛불 시위 갔다 왔는데 이번엔 뭔가 바뀔 거 같아. 만약에 탄핵이 부결되거나 아예 시도도 못하게 되면 큰 일이 날 거야. 분명히.”

“웃기지 마라. 헬 조선에선 그런 일 안 일어난다. 국민이 순둥이들인데 뭔 일이 일어나나?”

“아냐! 진짜 뭔가 일어날 거 같아.”

“아이 씨. 나 바쁘다니까. 쓸데없는 말 말고 끊어!”

그렇게 전화는 끊겼습니다. 가슴에는 여전이 알 수 없는 떨림이 남아 있는데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홀로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앉아 그것을 정리하려고 노력해봅니다. 그러나 무의미한 수고일 뿐입니다. 집회장에서 사용했던 작은 LED 양초를 켜봅니다. 제법 진짜처럼 호롱거리는 촛불이 마음을 안정시켜줄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는 개뿔!

떨림은 더 커지고 맙니다. 그렇게 제대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합니다. 다음날 직장으로 출근을 합니다. 이번 주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근무를 합니다. 그 덕에 토요일 근무가 끝나고 광화문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회사에 가니 동료들이 어젯저녁 시위에 참석했던 것이 어땠냐고 물어봅니다. 즐겁게 웃기 위해서 과장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 나 진짜 황당했다니까. 퇴근하고선 시청 쪽으로 도로로 걸어가는데 트럭 한 대가 천천히 내 쪽으로 오더라고.”
저는 명동에서 일을 합니다. 그날 시청으로 가는데 그 넓은 도로가 비어 있어 ‘언제 이 도로 위를 걸어보겠냐?’하는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도로 한 가운데로 걸었습니다.

“트럭을 살짝 피했지. 그런데 그 트럭위에선 어떤 사람이 구호를 선동하고 있고 그 뒤쪽으론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더라고! 어쩌긴? 그냥 그대로 시위대에 합류했지! 졸지에 시위대 맨 앞에서 촛불을 들었다니까.”
동료들은 이 말에 웃었습니다. 졸지에 시위대 주모자가 된 거라고요. 사진이라도 찍히면 큰일 난 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 저는 시위의 주모자가 되어 사진이 찍히면 위험한 회사에서 일을 합니다.

“그래서 도망가려고 조금씩 오른쪽으로 자리를 이동했거든, 그런데 종각 즈음에서 사람들 무리가 더 들어오는 거야. 왜 있잖아. 행진이 여러 곳에서 시작해서 한 군대로 합류된다고. 졸지에 도망도 못가고 시위대 맨 앞에서 청와대 쪽까지 갔다고! 진짜!”
동료들은 역시 웃으면서 고생했다고 해줍니다. 나는 그래서 정말 힘들다고 말하고 근무에 들어갑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만나는 동료마다 몇 번을 더했습니다. 쓸데없는 너스레지만 그렇게 했습니다. 저의 가슴 속에는 어떤 떨림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회사 친구와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야기를 합니다.

“어제 횃불을 봤어. 진짜 장관이더라.”

“왜 보기만 해! 너도 들게 해달라고 했어야지.”

“아니 그러기가 어려웠어.”

“뭐가 어려워. 가서 나도 들고 싶다고 말하고 들으면 되지. 그거 확 청와대 던져 버려!”
말 많고 과격하기 그지없는 친구는 별 희한한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한마디 툭 던집니다.

“너 혹시 횃불 보고 쫄았냐?”

“내가 왜!”
떨림이 멈춥니다.

그제야 알아차립니다. 느낌, 기분, 떨림이라고 표현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거대한 공포.

아니 공포라는 표현으로는 어려운 것.

압도.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에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경외감, 호주의 바다에서 처음으로 고래를 봤을 때의 놀람, 케나다 저 끝에서 하늘위에 걸린 오로라를 봤을 때의 설렘, 처음으로 임요환이란 프로게이머를 직접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까지......

일요일 저녁 TV에선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이 거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흘러나옵니다. 그걸 본 사람 중엔 ‘쟤들 갑자기 왜 저래?’라고 반응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제가 살고 있는 곳 근처에선 더 그럽니다.

저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날 광장에서 제가 본 것은 한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위대한 분노입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청와대까지 횃불이 들어오는데 저도 모르게 위축이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뻗쳐나갑니다. 세상으로 퍼집니다.

질려 버립니다.

장담하건데 촛불시위에 직접 참석하지 않는다면 이걸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TV화면으론 이걸 전할 수가 없습니다. 100만, 140만, 160만, 같은 숫자는 오히려 감각을 가립니다. 아마도 작게나마 이 시위의 감각을 느끼려면 아이맥스 영화관에는 가야 할 겁니다.

광장에서의 압도.

이 기운은 지금까지도 저를 흔들고 있습니다.



from kim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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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츠나
16/12/05 11:14
수정 아이콘
우리는 신성한 칼라를 통해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바카스
16/12/05 11:15
수정 아이콘
직접 민주주의의 실천
16/12/05 11:16
수정 아이콘
저도 그냥 청와대 문앞까지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더군요..
백만의 시민이 그냥 청와대 부수고 들어가서 머리채 끌어잡고 내동뎅이 쳐야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아직까지는 평화롭습니다.. 탄핵이라는 공적인 절차를 바라보고 있고 통과될거라 믿기 때문이죠..
저는 만약 탄핵이 안되면 청와대로 뚜벅뚜벅 걸어갈겁니다 그리고 끌어내릴겁니다. 그 와중에 경찰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인다면 그 경찰도 그리고 그 윗선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겁니다. 같이 죽어야죠..
우리나라의 주권은 나한테 그리고 우리 평범한 시민에게 있습니다..우리에게 총칼을 드는 순간 우리도 가만 있지 않을겁니다.
어디 범법자 따위가 국민을 대표할수 있습니까? 평생 고생이라고는 단 한번도 해본적 없는 저런 인간이 감히..경찰도 저런 범법자를 위해서 공권력을 쓰는 순간 같이 죽어야할 범법자일 뿐입니다..
이번주 토요일날 사람 여럿 죽어나가는거 보고싶지 않으면 탄핵 가결되고 당장 직무정지 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정말 사람 여럿 죽어나갈겁니다..그게 시민이든 경찰이든...마음 아프지만 이렇게 되지 않길 바랍니다..
ArcanumToss
16/12/05 11:22
수정 아이콘
1차 빼곤 모두 촛불집회에 갔습니다.
4번은 광화문, 1번은 수원역.
그런데 확실히 소규모 집회와 대규모 집회는 느낌이 다릅니다.
그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외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들도 '나와 똑같은 간절함으로 나왔겠지?'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기도 합니다.
그 자리의 여자분들은 더 섹시해보이고요.
게다가 이상형이 바뀌었습니다.
최소한 이런 집회에 참여할 줄 아는 분으로.
아... 이러면 조건이 하나 더 생긴건가요?
싱글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프레일레
16/12/05 12:50
수정 아이콘
포기하지마세요
저 따지고보면 집회에서 남편 만났어요
은근히 꽤 많아요 뒷풀이를 활용하셔요!
ArcanumToss
16/12/05 13:18
수정 아이콘
그... 그런가요... 희망이... 있군요.
-안군-
16/12/05 11:23
수정 아이콘
솔직히.. 정치적 술수가 통할거라느니, 조중동이 어쩔거라느니... 하는 분들은, 광화문 안 나가보신 분들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그 대열에 껴 있기에 망정이지, 저 대열이 우리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면, 오금이 저리고, 잠이 안오고, 미쳐버릴겁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그 장면을, 같은 눈높이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말이죠.

그냥... 별다른 위력을 안 행사해도, 세상을 다 으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위력이 느껴졌습니다. 이건 말로 표현이 안됩니다.
꽃이나까잡숴
16/12/05 11:38
수정 아이콘
그렇죠. 솔까말 한 10명한테만 압박받아도 사람 미치는데
200만명이 압박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저들이 저리 버티는 것도 저들이 "집단"인데다가
국민 알기를 우습게 아는 인간들이라 가능한건데... 정작 탄핵안에 반대표 던지는 선택이 쉽지는 않을겁니다.
아무리 무기명이라고 해도 말이죠.
16/12/05 11:26
수정 아이콘
100만 대군이란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군요.

압도적인 수의 힘이 무엇인지 12월 9일 우리는 확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12/05 11:28
수정 아이콘
새로운 시대의 전조를 보는 것 같습니다. 기술과 시민의식의 발달 덕분에 대의민주주의 체제에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이 융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
대의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할 삼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주권자인 국민이 대리할 수 있다는 압도적인 힘의 발현. 너는 국민의 뜻을 받들었으니 파란 카드, 너는 잘못했으나 참회하고 뒤늦게나마 국민에게 머리 숙였으니 노란 카드, 너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대죄인이니 레드 카드. 나라가 뒤틀린 운명으로 들어서면 국민이 직접 바로잡을 수 있다는 훌륭한 선례가 생길 것 같아 기쁩니다. 기존 4.19, 5.18 시민혁명과는 그 궤가 조금 다르기에 더 의의가 있어요.
ArcanumToss
16/12/05 11:31
수정 아이콘
광화문 집회를 보면서 떠올랐던 것은 새로운 한국형 민주주의, 길거리 민주주의였습니다.
새로운 언론 문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안군-
16/12/05 11:44
수정 아이콘
집회현장에서 한 아이 아버지가 제 옆에서 아들을 무등태우면서 이렇게 얘기하시더군요.
"아들아, 이제 민주주의가 잘 보이냐?"
네, 광화문 광장은 민주주의 그 자체였습니다.
ArcanumToss
16/12/05 11:48
수정 아이콘
아... 눈물 찔끔했습니다.
감동.
틀림과 다름
16/12/05 19:55
수정 아이콘
이 댓글을 추천합니다
그 눈을 사고 싶습니다
자루스
16/12/05 11:39
수정 아이콘
집회에 안나가본 사람들은 잘 모르실겁니다.
말로만 찬성하시는 분들도 가서 한번씩은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민주주의에 집회의 자유가 있는지 몸으로 느껴보시기를
16/12/05 11:49
수정 아이콘
결국 정치인들은 국민을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시위 보면서 예전에는 못느꼈던 감동까지 느껴지네요. 다만 일터졌을때만 불같이 반짝만이 아닌 주어진 권리부터 꼭 행사했으면 좋겠습니다.
투표합시다 정말.
ArcanumToss
16/12/05 11:53
수정 아이콘
집회 현장에 계시던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이 느껴지더군요.
정말 뭉클한 광경이라서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 건강만 허락한다면 8일과 9일에도 여의도에 가고 싶고 10일에는 광화문에서 축제를 즐기고 싶네요.
사랑하는 오늘
16/12/05 12:02
수정 아이콘
공포를 느꼈습니다. 압도적인 군중의 엄청난 절제력을 보면서 그 절제력 속에 숨어 있는 분노가 상상되서 집회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에 조용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다고, 국회와 청와대가 화를 참고 절제하는 국민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자극하면... 상상도 하기 싫네요.
프레일레
16/12/05 12:45
수정 아이콘
압도적 군중의 엄청난 절제력
<< 저도 이게 느껴져서 소름 돋았어요
환한 표정들과 징그러울 정도로 질서정연한 모습들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달까
어떻거 저 많은 인파가 소란, 동요한번 없이,촛불 끄라면 끄고 키라면 키고 소리 지르라면 지르고
처음엔 감동이었는데, 이게 거듭되니 소름끼쳐요 너무너무 냉정합니다 냉정해요
cienbuss
16/12/05 13:40
수정 아이콘
압도를 본 순간 게임게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자괴감이 드네요... 근데 정말 그정도 규모의 군중을 TV에서 보는거랑 현장에서 보는거랑 느낌이 정말 다르긴 합니다. 그런 인파를 말장난으로 통제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오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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