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5/12/11 21:52:38 |
Name |
AIR_Carter[15] |
Subject |
[공모 - 단편] delusion |
"GG! 이강산 무패로 그랜드슬램을 해냅니다!"
또 다시 나는 이겼고 우승을 차지했다. 본래 답답한걸 싫어하는 나는 재빨리 헤드셋을 벗고 타임머신에서 나왔다. 주변을 살펴보니 수많은 취재진들이 나를 향해 플래쉬를 터뜨리고 있었고 그 뒤로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가리키며 서로 말들을 주고 받았다. 상대선수는 타임머신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채 고개를 떨구고 울고 있다. 그뒤에서 위로를 하고 있는 감독의 모습. 항상 우승 뒤에 반복되는 풍경이다.
3번째라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질린다는 느낌이 든다. 차라리 상대선수가 분노해서 나에게 달려들거나 관중들이 욕을 하면서 물건을 던지면 더 흥미로울텐테 말야. 무료하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생긴지 올해로 20년째다. 처음 리그가 시작되던 당시만해도 몇년 못갈거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주를 이뤘지만 그말을 비웃기라도 하는듯이 지금은 당당히 스포츠 종목의 한 축이 되어있다.
프로게이머들의 노하우와 개인화면이 포함되어있는 DVD는 DVD챠트에서 이미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고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는 외국 선수들의 숫자도 이제는 엄청난 숫자를 이루고 있다.
게임리그를 위한 E-Sports 전용구장이 상암에 건설되어 과거보다 더욱 쾌적한 환경에서 경기를 진행중이고 지역연고제가 시행되면서 각 도시마다 E-Sports 전용구장이 건설중이다. 세계대회인 WCG는 이제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전세계인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이강산선수 한번도 아니 세트스코어조차 허용하지않고 무패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습니다. 지금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렇다. 나는 프로게이머 데뷔이후 무패가도를 달리고 있다. 데뷔당시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 불렀고 이제는 '스타의 신(神)' 혹은 '절대자(絶對者)'라고 부르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이기는것은 당연한것이었고 패배라는 글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전에서나 존재하는 단어일뿐이다.
"네, 연습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운이 많이 따라준것 같습니다."
라는 상투적인 대답이 내 입에서는 나왔다. 이런 대기록이-기록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사람들의 주목을 끈다는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기는건 당연한 것일뿐인데 왜들 이러는걸까?'
승리한 후에는 좀 웃으라는 다른사람들의 의견대로 나는 미소를 지으며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나를 응원하는 색깔이라는 검은색 풍선을 흔드는 무리들이 보인다. 무엇때문에 나를 응원하고 저렇게 열광하는걸까. 그동안 몇번이나 생각해보았지만 언제나 답을 얻을 수 없는 자문(自問)이었다.
한달 후
"마이크로 소프트배 스타리그 개막전이 오늘 이시각 상암 E-Sports 전용구장에서 펼쳐집니다. 개막전의 매치업은 무패의 사나이 이강산선수와 미국 휴스턴 출신의 테리에선수가 대결을 펼칩니다."
"야야, 오늘도 이강산이 이길까?"
"당연하지. 저 테리에라는 외국놈 별로 못해. 컨트롤만 좀 한다더라"
세팅을 마치고 옵저버가 만든방에 조인해 있던 내 귀에 관중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팅을 마치고 잠시 관중들의 잡담을 듣는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다. 하지만 세팅을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짜증이 난다.
또다시 하나의 리그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상대는 16강에 오른 선수중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선수였다. 복수의 기회를 선물하기 위해-그래봤자 내가 이기겠지만-결승전에서 꺾은 상대들중 한명을 지명하려 했으나 조지명식 당시 나와 꼭 경기해보고 싶다는 요청에 그를 지명하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이길것이기에 누가 상대로 결정되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지루하기만한 세팅시간이 지나고 상대방이 조인했다.
5, 4, 3, 2, 1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경기는 시작되었다. 맵은 버뮤다 삼각지대. 다소 러쉬거리가 가까운 맵으로써 이번대회부터 새로 쓰이는 3인용 신규맵이다.
경기는 시작되었고 언제나처럼 나는 앞마당 멀티를 시도했다. 수만번은 해왔던 행동이기에 생각하기전에 내 몸은 저절로 반응하고 있다.
'4번째로 참여하는 리그인가? 무슨놈의 리그가 3개월이나 잡아먹는거지. 1년여동안 겨우 3번 우승이라니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그냥 하루안에 끝내면 수십차례는 우승했을텐테. 제길'
다시 반복되는 상황이 지겨워진 탓인지 왠지 모를 짜증이 일어난다. 이런 기분을 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농락하는게 최고라는것이 떠오른건지 이내 흥분으로 적당한 엔돌핀과 긴장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어떻게 요리해줄까? 미안하지만 넌 내 화려한 쇼의 제물이 돼줘야겠어.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니 너무 상심하지는마'
잠시동안 생각을 하는사이 scv 1기가 앞마당에 도착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벙커링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벙커링을 시도하다 내 컨트롤에 무력하게 져온 바보 녀석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꼴을 보니 웃음이 나올뿐이다.
'흥! 그래도 한번 발악은 해보겠다는거구나. 그래 그렇게 용을 쓸수록 나의 즐거움은 늘어만간다. 흐흐흐 음?'
드론 4-5기정도를 앞마당쪽으로 이동시키는 순간 미니맵에 무언가가 추가병력으로 오고있음이 보였다. 미니맵을 클릭해보니 마린 2기가 한꺼번에 달라드는것이 보였다.
'뭐야. 아직 마린이 도착할 타이밍이 아닌데 8배럭인가? 제길. 해처리를 취소해야하나? 아냐 저런 조무래기를 상대로 해처리를 취소하다니? 내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어'
모든 드론들을 앞마당쪽으로 이동시켰고 이제 막 생산된 저글링들과 함께 scv와 마린에게 달라들었다. 테란은 scv 8기와 마린 3기의 병력이다. 조금 힘든 상황인걸 알지만 내 컨트롤을 믿고 전투를 펼쳤다. 거기다 최약체로 꼽히는 녀석이 아닌가? 당연히 나는 벙커러쉬를 막고 녀석을 농락할것이다.
나의 드론과 저글링들은 좌우로 파도가 갈라지듯 펼쳐지면서 scv의 뒤에 위치한 마린들에게 달라들었다. 테란의 병력이 많기는 하지만 이런식으로 달라들면 누구라도 당황하면서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scv와 마린들을 처리한 후 어떻게 요리할것인지 생각하며 내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사라지고 있었다.
'이자식 뭐야! 저글링들을 일점사 해주면서 빼주다니 말도 안돼'
테리에는 순식간에 달라드는 드론과 저글링을 보고 당황하지 않고 scv로 저글링들의 움직임을 막으면서 일점사를 해주는 컨트롤을 보여줬다. 경기전 컨트롤만 뛰어나다는 관중들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설마 내가 지는건가? 아냐. 그럴리가 없어. 내가 질리가 없단말야!'
나는 재빨리 본진으로 드론들을 뺐고 크립콜로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녀석이라면 분명히 앞마당의 해처리를 부수고 올라올테니 그때까지 시간이 생길거야. 나는 역전할 수 있다. 내가 질리 없어!'
나의 이런 예상과는 다르게 테리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마린들을 내 본진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변태중이던 크립콜로니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파괴되었다. 이제 내게 남은거라곤 5기의 드론과 2개의 해처리, 스포닝풀 그리고 라바 6기뿐이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GG를 치고 나갈까? 아니 스위치를 꺼버리고 다시 시작할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나는 슬며시 시선을 옆으로 돌려 관중들을 바라 보았다. 몇몇은 약간 어이 없다는듯이 웃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손으로 입을 가린채 놀란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뭐야! 내가 이런 허접한 전략따위에 졌다고 비웃는거냐! '
나의 상징인 검은색 풍선을 든 팔을 내리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뭐야 당신들은 날 응원하는거 아니었어? 이제 패배했으니 내 존재가치는 사라진거야? 어서 그 풍선을 흔들고 나를 응원해줘! 나는 스타크래프트의 신이자 절대자야. 내가 질리가 없어!'
띠딕
No.1 was Eliminated.
You failed to achive Victory!
나는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동안 구경할 수 없었던 어두운 화면과 메세지가 떠있는 모니터만을 바라볼뿐이었다.
'이 메세지는 뭐지? 내가 진건가? 내가? 설마 패했다는건가? 믿을 수 없어'
내 사고는 정지되었고 잠시동안 내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동안 혼란스러운 상태이던 나에게 테리에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나를 동정하는거냐! 감히 나를!'
악수를 청하는 손을 보자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되었고 키보드를 들어 테리에의 머리를 가격했다.
퍽! 퍽! 퍽!
테리에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고 키보드의 가격이 이어질수록 내 얼굴과 옷은 피로 얼룩져갔다. 이윽고 안전요원들이 나를 떼어냈고 여성관중들의 비명소리는 커져만갔다.
"놔! 내가 질리가 없어. 이 게임은 무효야. 그래 이건 꿈이야. 내가 지다니 말도 안돼!"
Epilogue
"또다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어젯밤 18세 이모군이 식음을 전폐하고 50여시간동안 게임에 몰두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평소 게임중독 증상을 보이던 이모군은 방안에 자신이 제작한 트로피를 진열해놓고 자신을 프로게이머라고 지칭하는등 정신착란 증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사고 당일 방안에서 이모군의 괴성이 들려왔고 이를 듣고 방에 들어온 이모군의 어머니가 재빨리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고 합니다.
사고 당시 방안에는 키보드로 휘두른탓인지 트로피와 키보드, 모니터등의 파편이 널부러져 있었고..... 치지지지직"
어두운 거실에서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쉐한 소리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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